뉴질랜드(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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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절 가능한 불행에 대하여
2018년 8월 16일 목요일 토요일에 차를 팔고, 어제 저녁에 새로운 차를 사고, 주말에 의뢰받은 사진 촬영을 하고, 월요일과 화요일은 사진 작업을 하고 글을 쓰는 데 보냈습니다. 한 달 중 컨디션이 가장 좋지 않은 시기도 함께 견뎠네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한 주의 중간 지점도 지나 있습니다. 조금 더 괜찮은 차를 사기 위해 4개월 동안 모험을 함께 했던 1999년식 혼다 오디세이를 팔기로 했어요. 그동안 시답잖은 이메일 피싱 시도가 네 번이나 있었고, 90년대 차량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과도하게 값을 깎기를 요청하는 사람들에게서만 연락이 왔습니다. 거의 두 달 만에 이 차와 영혼이 딱 맞는 사람들이 나타났어요. 카일과 세이미, 콜로라도에서 온 20대 초반의 아메리칸 커플이었답니다. 그들은 요구하는 ..
2018.08.16 -
어둠 속의 실루엣, 그리고 잊지 못할 밤
2018년 7월 16일 월요일 일요일 저녁, 오클랜드로 돌아갈 채비를 끝마쳤습니다. 보름 만이었지요. 한 달의 절반이라는 시간이 짧을 수도 있겠지만 90퍼센트의 시간이 일로 채워진 15일은 참으로 길게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일이 끝이 나니 무척 후련했어요. 마무리 현장 사진 촬영은 카메라를 소지한 제가 맡았습니다. 광각 렌즈의 과장미 덕분에 사진이 더욱 멋스럽게 찍혔어요. 이제 '웰링턴 - 오클랜드 9시간 드라이브'라는 마지막 관문만 남았습니다. 대낮에 출발할 거라 기대했는데, 또다시 일정이 미뤄져 창밖도 볼 수 없는 깜깜한 밤에야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어쨌거나 하루를 더 낭비하느니 빨리 집에 가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기는 했습니다. 액셀 페달에 남아 있는 힘을 보냈습니다. 짐을 가득 실은 밴의 묵직한 ..
2018.08.09 -
일요일의 웰링턴 산책 (2) ─ 판도로 빵집과 뉴질랜드 첫 가톨릭 미사
2018년 8월 5일 일요일 부둣가를 걷다가 성당으로 향하는 빅토리아 스트리트로 발길을 돌린 건 허기가 느껴질 즈음이었습니다. 뉴질랜드 포트레이트 갤러리(New Zealand Portrait Gallery)를 방문하고 싶었지만 오전 10시 30분에나 문을 열어서 포기해야 했거든요. 스파크 와이파이존을 벗어나자 스포티파이 앱에서 듣고 있던 음악이 뚝 끊겼습니다. 오랜 세월 귀에서 음악을 거의 떼지 않고 살았지만 환경이 바뀌어 저도 이제는 덤덤하게 이어폰을 귀에서 뺍니다.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했던가요. 모험을 결심하고 나서는 짐을 쌀 때부터 삶의 부피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했고, 더 나아가 길 위의 생활자가 되고자 한다면 지금보다 살림살이를 더 줄여야 합니다. 물건뿐만 아니라 '습관'면에서도 마찬가지입..
2018.08.05 -
일상이 동화가 되는 마법
2018년 4월 21일 토요일 살다 보면 현실 밖에 존재할 것만 같은 장면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거의 항상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는 제게 그런 순간은 특별한 행운의 기회가 됩니다. 장면을 흘려 보낼지, 아니면 가로로 담아볼지, 세로로 담아볼지, 표준 렌즈로 담아볼지, 광각 렌즈로 담아볼지, 아니면 망원 렌즈로 무언가를 부각시킬 것인지, 어떤 주제에 초점을 맞출지, 감정이 어떤 장면에서 극대화될지, 생각하고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시간은 그리 오래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레와에서 SUP 보드를 타고 나와 젖은 수트를 갈아입고 있는데 마침 무지개가 눈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그냥 무지개가 아니라 쌍무지개! 뉴질랜드에 와서 한국에서는 몇 년 동안에 볼 무지개를 다 보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날 본 무지개 만큼..
2018.08.02 -
웰링턴 여행, 웰링턴 '출장'이 되다
2018년 6월 9일 토요일 웰링턴으로 웰링턴에서 일손이 급히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고 원래는 여행으로 계획했었다가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회사에서 지원해준 비행기 티켓이 이메일로 날아왔어요. 수요일 오후 네 시 비행기였습니다. 그전까지 하던 글 작업을 모두 마무리해야 했어요. 마감시간이 코 앞에 찾아온 글 노동의 시작이었습니다. 열심히 준비한 OO프로젝트 첫 번째 이야기를 떠나기 전날 발행했고, 여행 짐은 당일 날 아침에나 챙길 수 있었습니다. 가뜩이나 생각이 느린데 꾸물거릴 시간이 별로 없어서 평소보다 생각 회로를 몇 배속으로 가동할 수밖에 없었어요. 웰링턴이 많이 춥다고 들었는데, 도대체 얼마나 추운지 몰라서 껴입을 수 있는 얇은 겨울옷들을 배낭에 넉넉하게 챙겼습니다. 사실, 옷도 별로 없어서 ..
2018.08.01 -
뉴질랜드 첫캠핑, Opoutere Coastal Camping
2018년 4월 14일 토요일 - 15일 일요일 어렸을 때부터 물이 닿은 흙과 돌 냄새를 좋아했습니다. 엄마가 베란다에서 분갈이를 한다고 화분의 흙을 갈아엎을 때 거실에서 학습지를 풀며 가득한 흙냄새를 맡았던 기억, 돌이끼에 분무기로 물을 뿌릴 때마다 신기루처럼 나타나던 향기, 뒷산 편백나무 숲길을 걸을 때의 상쾌한 공기, 이사 간 후에는 비가 온 직후에나 집 앞의 산책로에서 겨우 맡을 수 있었던 그 향기입니다. 엄마 뱃속이 이미 푸른 숲이었는지 나는 자꾸만 그 공기를 편안히 여기고 그리워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지금, 한국에서보다 그 냄새를 더 자주 맡을 수 있는 곳에 와 있습니다. 제가 자는 동안 비가 내리고 그치는 경우가 많아서 아침에 창문을 열면 ─ 농도 짙은 공기가 풀어진 비단처럼 방 안으로 부드..
2018.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