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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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근처 작업 공간: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아트 라이브러리, 원당마을한옥도서관
홀로 서울 구석 동네에 지내는 것은 사뭇 외로운 일이다. 미술관이나 예술서적들을 볼 수 있는 곳에 가려면 대중교통을 한 시간씩 타고 다녀야 하는데, 이제는 버스나 지하철 냄새만 맡아도 진절머리가 날 지경에 이르렀다. 무언가를 즐기기도 전에 이미 지쳐버리거나, 집에 돌아왔을 때 잔잔하게 남아 있는 멀미 때문에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돌아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자연이 가까운 동네를 선택한 대가였다. 이제는 정말로 집과 가까운 '대안 공간'이 필요한 순간이다. 재택근무로 일을 하고 있는 나에게 이따금씩 집을 벗어나는 근무 공간이 절실할 때가 있다. 수유와 가까운 곳에서 책과 함께할 수 있는 예술 공간을 탐색해보았다. 덕분에 서울 유명 도서관보다 훨씬 여유로운 환경을 찾아냈다. 이곳들을 알게 된 후로는 멀미..
2024.03.20 -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세계, 아트 북으로 만나는 경계 없는 상상
문장 서너 개와 서툰 그림이 담긴 그림일기를 시작으로, 다섯 살 때부터 30대가 된 지금까지 일기를 써오고 있다. 콜라주 등 다양한 방식을 시도하며 일기는 점차 '오직 나만을 위한 매거진'이 되어갔다. 기록을 책이라는 형태로 처음 엮을 때는 별다른 경험이 없어서 가장 익숙한 보편적인 책 형식에 담아냈다. 숲의 적막과 고요한 세계, 그곳에서 경험하는 일들. 이를 활자로 표현해 읽는 이의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질 수 있도록 애를 썼다. 책이 완성된 후, 나중에 그림책 에디션이 나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혹은 기존 방식이 아닌 뜻밖의 형태를 만나거나. '가장 나다운 책'이 어떤 걸까 고민하던 중 부산 중구 독립서점 '피스 카인드 홈'의 프랭코 님과 사진전시를 겸한 독립출판을 기획해 볼 기회가 생겼다..
2023.09.24 -
[공연] 일렉트로닉, 생각의 경계를 허물다 MUTEK JP 뮤텍 도쿄 2022 (2)
자정이 넘은 캄캄한 밤, 도쿄에서 열린 MUTEK 금요일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정적인 앰비언트로 시작해 숨 막히는 하드코어 테크노까지, 일렉트로닉 세계를 다양하게 여행한 밤이었다. 낯설지만 상상 그 이상이었던 공연은 12월의 얼어붙은 밤공기를 뜨겁게 녹여냈다. 5시간가량 이어진 스탠딩에 몸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연료를 태운 열기구처럼 자꾸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두꺼운 외투를 벗자 어깨와 목덜미에 갇혀 있던 뜨거운 공기가 공중으로 날아간다. 숙소로 돌아가는 언덕,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있는 소년 무리를 마주쳤다. 밤을 긁는 날카롭고 거친 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진다. 늦은 밤 시간을 한낮처럼 쓰며 넘어지고, 엎어지고, 어디 하나 크게 부러질 것 같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는 소년들..
2023.04.16 -
[공연] 일렉트로닉, 감각의 경계를 허물다 MUTEK JP 뮤텍 도쿄 2022 (1)
시간은 평평한 모래사장이다. 어느 한 곳에 빈 구덩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곳에 모래를 쌓아 올려야 한다. 그리고 밀려오는 파도. 모래 알갱이와 바닷물이 뒤섞여 다시 원래 상태로 되돌아간다. 모든 것이 덮인 표면, 뒤돌아보면 시간은 그런 식으로 늘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도쿄에서 보내는 나흘 간의 가벼운 시간을 위해 다른 날들을 묵직하게 보냈다. 금요일 오전 8시에 떠나는 비행기라 전날 퇴근 후 마감 작업을 정리하고 짐을 다 챙기고 나니 새벽 2시. 세 시간 후에 다시 일어나 공항으로 향했고 도쿄로 가는 비행기에서 기절해 잠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수고스럽고 피곤하게 일본행을 강행한 이유가 있다. 12월이 될 때까지 휴가를 잘 참아왔고, 단순한 휴가가 아닌 독특하고 재밌는 방식으로 이 시간을 쓰고 싶다..
2023.03.09 -
[공연] 도쿄에서 만나는 아방가르드 일렉트로닉 음악・디지털 예술 축제 <2022 MUTEK Tokyo>
가랑비가 내리는 어느 날 밤, 친한 언니와 함께 분무기 같은 가벼운 비를 맞으며 데크에 앉아 있었던 적이 있다. 하늘에 흩어진 빗물이 희뿌연 장벽을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간단한 술과 안주로 저녁을 먹고 있던 우리의 대화는 시간이 갈수록 깊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머리카락 끝에서 물이 뚝뚝. 입고 있던 재킷은 물기를 머금어 묵직해졌다. 선실 안에 있던 타올로 방금 목욕을 마치고 나온 사람처럼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아내었다. 아주 서서히, 너무나 자연스럽게 비가 나를 완전히 덮어버렸다. 봄밤의 가랑비처럼 내가 서서히 스며든 세계가 있다. 종이와 아날로그, 오래된 것들을 사랑하는 성질이 별안간 이라는 기계의 중심부로 향한 것이다. 경멸이 사랑으로 변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일렉트로닉 음악에 대한 지독한 편견으로 인..
2022.12.06 -
[음악] 잠 못 드는 당신을 위한 천재 뮤지션과 인공지능의 선물, 제임스 블레이크xEndel의 "Wind Down"
2022년 5월, 오래전부터 좋아하던 영국 아티스트 제임스 블레이크(James Blake)의 낯선 음반을 만났다. 개인의 상황에 맞는 사운드 환경을 제공하는 독일의 소프트웨어 Endel사와 함께 협업한 음반이라고 한다. Endel은 사운드 영역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해 이용자들이 보다 쉽게 집중하고 좋은 잠을 자고 스트레스를 완화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고 한다. 커버 사진을 훑어보면 아래쪽에 'Science-powered Soundscapes'라고 적혀 있다. 애초에 수면 유도를 목적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제임스 블레이크의 다른 음반들보다 앰비언트적인 특성을 더욱 또렷하게 느낄 수 있다. 이 곡들은 마치 2019년 발매된 [Assume Form]의 마지막 트랙 'Lullaby for My Insomniac..
2022.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