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일렉트로닉, 생각의 경계를 허물다 MUTEK JP 뮤텍 도쿄 2022 (2)

2023. 4. 16. 22:40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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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정이 넘은 캄캄한 밤, 도쿄에서 열린 MUTEK 금요일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정적인 앰비언트로 시작해 숨 막히는 하드코어 테크노까지, 일렉트로닉 세계를 다양하게 여행한 밤이었다. 낯설지만 상상 그 이상이었던 공연은 12월의 얼어붙은 밤공기를 뜨겁게 녹여냈다. 5시간가량 이어진 스탠딩에 몸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연료를 태운 열기구처럼 자꾸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두꺼운 외투를 벗자 어깨와 목덜미에 갇혀 있던 뜨거운 공기가 공중으로 날아간다.

    숙소로 돌아가는 언덕,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있는 소년 무리를 마주쳤다. 밤을 긁는 날카롭고 거친 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진다. 늦은 밤 시간을 한낮처럼 쓰며 넘어지고, 엎어지고, 어디 하나 크게 부러질 것 같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는 소년들. 천둥벌거숭이 같은 도쿄 한복판에서 날 것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나날이다.

 

스케이트 보드를 즐기는 소년 / ⓒ2023. 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토요일 저녁, 도쿄에서 만끽하는 마지막 MUTEK. 오늘 공연은 대규모 공연장으로 유명한 Spotify O-EAST에서 열린다. 유흥과 클럽 문화가 밀집해 있는 도겐자카 거리. 이른 저녁이었지만 이미 걸쭉하게 취한 이들의 즐거운 고성으로 가득하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숲을 지나니 아수라장이 된 거리 한복판에 건물 입구가 나타난다. 벽에 붙은 MUTEK 포스터를 보니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다.

    계단을 올라가자 스태프들이 티켓을 확인한다. 이미 얼리버드 티켓을 구매한 상태지만 이곳은 이상하게 '입장료'를 또 내야한단다. 으음...? 찝찝한 마음으로 600엔을 지불하니 원 프리 드링크 쿠폰을 쥐어 준다. 그냥 술값을 미리 받은 것뿐이군. 그렇다면 오늘 공연은 알코올과 무한히 함께해도 된다는 말? 술맛이 눈곱만큼 느껴지는 일회용 진토닉을 단숨에 마셔버리고는 기묘한 생각이 떠올라 직원에게 티켓 재입장 가능 여부를 확인했다. 나갔다 와도 된다고 해서 함께 공연을 보던 친구와 곧장 건물 아래 편의점으로 내려갔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일본 증류주 한 병과 탄산수를 섞어 즉석 하이볼을 만들었다. 적절히 섞어 각자의 텀블러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돌아서기가 무섭게 텀블러에서 자꾸만 새어 나오는 탄산수 가스. 칙! 칙! 칙! 손으로 막고 입으로 막아도 쉴 새 없이 튀어나오는 내용물에 당황과 웃음이 동시에 터진다. 칙! 칙! 칙! 취한 이들의 눈에도 우스웠는지 다들 실소를 토해낸다.

    뿜어져 나오는 가스를 아무렇지 않은 척 손으로 누르고 재입장을 하려고 하자 이번엔 다른 직원이 말을 바꾼다. 아까 지불한 입장료는 일회성이라 또 내야 한다고. 잘 모르는 직원이 우리에게 잘못 알려준 모양인지 높은 직급의 직원이 나와 정중하게 요청한다. 정성스럽게 삥 뜯기는 기분인데, 뭐지? 어떻게든 주머니를 털어내려는 상업적인 심보는 고약하지만, 이중 지불한 입장료보다 훨씬 더 장렬하게 즐기겠노라 굳게 다짐했다. 이번 공연도 저번 글처럼 각 아티스트를 소개하며 다양한 영상도 함께 준비했다.


12/10/2022 NOCTURNE 1

 


19:50 ~ 20:30 - Mieko Suzuki & Claudia Rohrmoser
    오늘 공연도 정적인 퍼포먼스부터 시작하는 MUTEK. 텀블러 하이볼로 급격히 상승되었던 기분이 한결 차분해진다.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베를린에서 활동 중인 미에코 스즈키(Mieko Suzuki)는 DJ이자 사운드 아티스트, 작곡가다. 루프, 스크래치, 이펙트 페달을 다양하게 사용하며 노이즈를 기반으로 한 미니멀 사운드로 독특한 질감을 구현한다. 어린 시절, 클래식 음악으로 처음 훈련을 받았다는 미에코 스즈키. 그래서 그런지 작업 전체가 멜로디를 절제한 전자 교향악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녀는 2009년부터 베를린 OMH 갤러리와 함께 'KOOKOO'라는 실험적인 이벤트를 열고 있다. 발전된 기술 그 자체보다는 '협업과 아이디어 실현'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한다. 그녀의 작업은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단순한 잡음들도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재료가 될 수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Tresor 30 Invites OHM - Mieko Suzuki / June 11 / 7pm-8pm by HÖR BERLIN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출신의 비디오 아티스트 클라우디아 로어모저(Claudia Rohrmoser)는 실험적인 단편 애니메이션, 시청각 공연, 비디오 무대 디자인을 제작한다. 공간의 제약을 벗어난 새로운 차원의 연극과 사운드 실험을 지향하는 Cinema Vertigo의 설립자이며 FH Bielefeld에서 모션 디자인・미디어 시노그래피(scenography)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번 공연에서 미에코 스즈키의 사운드와 함께 영상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날 공연 영상을 따로 구할 수가 없어 네덜란드 안무가 나닌 리닝(Nanine Linning)과 협업하는 과정이 담긴 인터뷰 자료로 대신한다. 다양한 물질을 사용해 춤을 해석하고 이를 추상적인 언어로 변환하는 비디오 작업이 무척 매력적이다.

Nanine Linning Anima Obscura Documentary with video scenographer Claudia Rohmoser

 


20:40 ~ 21:25 - machina & Ali M. Demirel "The Bath"
    이번 MUTEK에서 한국 아티스트를 만나는 유일한 시간. 김여희는 마키나(machina)라는 이름으로 일렉트로닉 음악 분야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다양성이 받아들여지기 한결 쉬운 도쿄를 선택한 마키나. 이곳에서 그녀는 불필요한 간섭 없이 마음껏 자신의 세계를 탐구할 수 있었다. 이번 공연에서는 케이팝 스타로서 성장했던 과거를 기반으로 탄탄하게 다진 보컬과 사운드 퍼포먼스, 거기에 무대 연출까지 가미하며 독보적인 1인 무대를 선보였다. 아래에 MUSIC SHARE에서 선보인 라이브 공연과 20분가량의 인터뷰가 담긴 영상을 준비했다. 섬세하면서도 강렬한 사운드 안에서 한 개인이 스스로를 발견해 가는 과정을 상상할 수 있어 즐거웠다.

machìna : MUSIC SHARE #078 @Red Bull Music Studios Tokyo

 

    터키에서 태어나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알리 엠 드미렐(Ali M. Demirel)은 원자력 공학과 건축학을 기반으로 시청각시스템을 연구해 나간 미니멀 비디오 아티스트다. 컴퓨터 코드부터 오가닉 영역까지 광범위한 재료를 사용해 추상적이고 감각적인 작업을 선보인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을 포함해 세계 각지의 페스티벌에서 라이브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일렉트로닉 프로듀서 Plastikman(Richie Hawtin)와 오랜 기간 비주얼 아티스트・디자이너로 협업한 것으로 유명하다. 음악과 작업기가 담긴 영상이 있어 아래에 함께 공유한다. 

Ali M. Demirel: "When I hear something, I see something" (Groove TV) 

 

   이번 MUTEK 공연에는 무대 한편에 욕조가 놓여 있다. 마키나와 알리가 준비한 공연의 이름은 <The Bath>. 두 아티스트가 바라본 '목욕'은 자신과 만나는 가장 쉬운 행위라고 한다. '전환-수용-반성-계몽-평화'의 5단계가 차례대로 펼쳐지며 감상자도 그 감정과 리듬에 몸을 맡기며 내면의 샤워를 경험하게 된다. 마키나의 목소리와 전자 음악으로 한국 전통 민요 가락을 재해석한 부분이 섞여 나올 때는 숨 죽이며 지켜보다가 탄식을 내뱉기도 했다. 

 


21:40 ~ 22:25 - Kyoka & Shohei Fujimoto "CINEMA BLACKBOX"
    어두운 수면 아래에서 거칠게 흐르는 무질서. 베를린과 도쿄를 오가며 활동하는 쿄카(Kyoka)는 냉혹하지만 생명력 넘치는 리듬 사운드를 선사한다. 어린 시절 피아노 레슨과 테이프 레코더로 이어진 호기심은 자기 음악을 실현하고 싶은 욕구로 그녀를 들끓게 했다. '드글드글', 쿄카의 음악을 들으면 이 단어가 생생하게 머릿속에 박힌다. 2014년 발매된 앨범 [Is (Is Superpowered)]를 처음 들은 순간 인간을 초월한 뱀파이어가 된 기분을 느꼈다.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이런 감정이 들게 하다니. 2017년 보일러룸(Boiler Room)에서 선보인 쿄카의 라이브를 준비했다.

 

Kyoka Boiler Room Tokyo Live Set

 

    도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쇼헤이 후지모토(Shohei Fujimoto)는 빛과 공간을 다루는 미디어 아티스트다. 다양한 현상 속의 데이터와 정보를 추상화하여 복잡하게 버무린 다음, 새로운 속성으로 재탄생시킨다. 그의 인터뷰가 담긴 12분짜리 영상의 10분 즈음부터 이번 MUTEK 공연에 대한 힌트를 엿볼 수 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찾는 시선이 이제는 우리 몸의 내부로 향한다.

 

SHOHEI FUJIMOTO | ARTIST SPOTLIGHT | ARTECHOUSE

 

    쿄카와 쇼헤이 후지모토 두 사람이 준비한 공연은 <CINEMA BLACKBOX>. 인간의 뇌를 블랙박스에 비유하여 미지의 구조로 포착해 소리와 영상으로 해석한 퍼포먼스다. MRI, 뇌파, 뇌에서 영감을 얻은 음악 이론을 기반으로 '뇌'와 '자아'의 관계를 과학자의 눈으로 드러낸다. 쇼헤이 후지모토는 직접 MRI을 찍으며 데이터를 수집했다고 한다. 퍼포먼스 내내 거대한 실험 상자에 들어있는 것 같았다. 이 기괴한 사운드 비주얼 논문이 궁금하다면 3분으로 축약된 영상을 직접 확인해 보자.

 

3min Excerption - Kyoka & Shohei Fujimoto - 自己共鳴投影上映開始 - CINEMA BLACKBOX

 

22:45 ~ 23:30 - Byetone "Pulses"
    절반쯤 마신 '텀블러 하이볼'의 취기와 함께 가장 기대했던 바이톤의 공연이 펼쳐진다. '바이톤'이라는 가명으로 솔로 활동을 이어가는 올라프 벤더(Olaf Bender, a.k.a Byetone)는 학창 시절 16mm 필름으로 창작 세계에 발을 들인 뒤 독학으로 자기만의 음악 세계를 형성해 나갔다. 음악, 영상, 라벨 디자인 - 그가 다루는 모든 세계는 미니멀리즘과 닿아있다. MUTEK에서 선보인 <Pulses>는 음악 전반의 안정적인 리듬에 쌓이는 음악적 맥박을 의미하기도 한다. 단순한 리듬만으로 관객들을 모조리 껴안고 완벽한 최면으로 이끄는 그날의 공연과 가장 닮은 영상을 준비했다. 그의 창작 철학도 인터뷰로 만나보자.

 

 

Byetone [a/v live] @ Tag-Nacht by Spbpassion

 

BYETONE from Slices Issue 4-12

 

23:45 ~ 24:30 - NSDOS
    MUTEK의 가장 마지막 공연. 자유롭게 광기를 맛보는 시간. 바이톤이 최면술사였다면, 이제 매혹적인 '샤먼'을 만날 차례다. NSDOS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키리쿠 데스(Kirikoo Des)는 파리에서 무용 공부를 마치고 움직임을 탐구하기 위한 독특하고 고유한 소리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기존의 도구에서 벗어나 오래된 사운드 카드, 에뮬레이터, 용접된 금속 조각, 센서, 인터랙티브 장치, 창의적인 코딩 프로그램을 이용해 데이터를 수집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개척해나가고 있다.

    그의 공연을 보는 내내 머릿속에 맴도는 단어는 자기 세계 속으로 헌신에 가까운 '몰입(Devotion).' 퍼포먼스 내내 온몸을 격렬하게 움직이는 것이 그의 시그니처다. 중간에 디제잉을 멈추고 무대 한쪽으로 나와 춤을 쏟아낼 때면, 음악 안에 있는 영적인 무언가와 강하게 결합한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매체의 한계마저 뛰어넘는 NSDOS, 날 것 그대로의 순수함에 강하게 매료된 밤이었다.

 

NSDOS Live at Villa Medicis - Roma - by ARTE CONCERT

 

NSDOS - INSEKT (인터뷰 포함)

 


    애써 찾지 않으면 구하기 어려운 보석들을 수집함에 차곡차곡 정리하는 기분으로 2022년의 MUTEK 도쿄를 기록해 보았다. 지난 글에서는 감각의 경계를 허물고, 이번 글에서는 생각의 경계를 허물었다. 실험 정신을 지지하는 MUTEK 공연 안에서는 자기 색을 찾는 용기와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프리 패스를 손에 쥔 것처럼, 자유롭고 가볍게.

    이상하게도<어떠한 영역에서도 경계와 한계는 무의미하다>는 확신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MUTEK의 에너지가 일상에 제대로 스며든 모양이다. 10편의 공연, 16명의 아티스트를 탐험한 이틀 간의 사운드 비주얼 여행. 새롭고 강렬한 세계를 경험하며 예술 분야로서 일렉트로닉이 가진 무한한 매력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 금요일 공연 기록 다시 읽기

 

[공연] 일렉트로닉, 감각의 경계를 허물다 MUTEK JP 뮤텍 도쿄 2022 (1)

시간은 평평한 모래사장입니다. 어느 한 곳에 빈 구덩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곳에 모래를 쌓아 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밀려오는 파도. 모래 알갱이와 바닷물이 뒤섞여 다시 원래 상태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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