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일렉트로닉, 감각의 경계를 허물다 MUTEK JP 뮤텍 도쿄 2022 (1)

2023. 3. 9. 01:40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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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은 평평한 모래사장이다. 어느 한 곳에 빈 구덩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곳에 모래를 쌓아 올려야 한다. 그리고 밀려오는 파도. 모래 알갱이와 바닷물이 뒤섞여 다시 원래 상태로 되돌아간다. 모든 것이 덮인 표면, 뒤돌아보면 시간은 그런 식으로 늘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도쿄에서 보내는 나흘 간의 가벼운 시간을 위해 다른 날들을 묵직하게 보냈다. 금요일 오전 8시에 떠나는 비행기라 전날 퇴근 후 마감 작업을 정리하고 짐을 다 챙기고 나니 새벽 2시. 세 시간 후에 다시 일어나 공항으로 향했고 도쿄로 가는 비행기에서 기절해 잠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수고스럽고 피곤하게 일본행을 강행한 이유가 있다. 12월이 될 때까지 휴가를 잘 참아왔고, 단순한 휴가가 아닌 독특하고 재밌는 방식으로 이 시간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도쿄에서 열리는 MUTEK 소식을 듣게 됐다. 지금까지는 '공연을 보러간다'고 하면, 특정 인물이나 그룹의 팬이라서 간 것이 대부분이었다. 특정 장르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경험해 보고 싶은 이유로 해외에 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어릴 적 들었던 클래식 음악의 깊은 울림과 영화의 사운드 트랙이 주는 여운, 재즈 선율과 디스코・힙합/알앤비 장르에서 느끼는 리듬과 소울, 밑바닥의 슬픔과 극강의 환희까지⎯'일렉트로닉'은 지금껏 음악에서 느낄 수 있었던 다양한 스펙트럼 모두를 껴안고 있다. 그렇기에 이 장르가 여전히 낯설지만 자꾸 더 궁금해지는 마음을 따라가보기로 했다.

    미리 예약해 둔 게이세이 스카이라이너 티켓을 교환하고 닛뽀리에 내려 숙소가 있는 시부야행 열차에 올랐다. 숙소는 시부야역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 시부야역 출구로 나오자마자 '스크램블 교차로(Shibuya Crossing)'로 향하는 인파에 나도 모르게 휩쓸렸다. '세계에서 가장 분주한 지하철역'이라는 타이틀답게 캐리어를 단단히 붙잡고 겨우 구석으로 가서 구글맵을 확인해야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일본인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정장 차림으로 바삐 움직이는 회사원이 지나가고 곧이어 코스튬을 한 네 명의 소녀가 웃으며 우르르 지나간다. 편의점에서는 유럽 청년이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며 손님을 맞이하고 있고, 횡단보도를 걷는 내내 다양한 외국인 여행자들과 마주쳤다. 도쿄가 어마무시한 국제 도시라는 걸 다시금 실감하는 순간이다. 문화 예술-패션-IT 분야를 아우르는 시부야에서 MUTEK은 어떤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을까?

도쿄-시부야-거리
Shibuya City / (c)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이른 저녁을 챙겨 먹고 금요일 공연이 열리는 시부야 스트림 홀(Shibuya Stream Hall)로 향했다. 숙소가 있는 도미가야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떨어져 있어 산책 삼아 걷기에도 충분한 거리다. 마스크에 가려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지나가는 이들의 눈동자에서 이미 금요일 밤의 열기가 완연하다. 

Nightscapes in Tokyo / (c)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MUTEK JP _ Edition 7
International Festival of Digital Creativity and Electronic Music

 

MUTEK JP | 電子音楽とデジタルアートの祭典

MUTEK.JPは、デジタル・クリエイティビティの開発と普及を目的とした国際的な芸術文化活動を行う団体です。

tokyo.mutek.org

 

    MUTEK은 개최 기간 내내 오전부터 늦은 오후까지 기업・대학과 협력하여 워크숍, 디지털 랩, 컨퍼런스, 전시, 공연 등이 다양한 장소에서 함께 열린다. 이번 MUTEK JP에서는 12월 8일(목) ~ 9일(금) 이틀간 <호기심과 창의성에 대한 담론>, <몰입형・상호교감형 예술 형태의 국제적 부상>, <디지털 예술-연구-비즈니스 간의 무경계 크로스 오버>, <시청각 예술에 사용되는 신경과학과 인공지능 분야>, <Web3 안에서 창의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방법>, <도시 개발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부야> 등 다양하고 심층적인 주제로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참여하는 대화의 장이 열리기도 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꼭 참여해보고 싶은 컨퍼런스들도 많았다.

 

VR Exhibition in MUTEK JP 2022 / (c)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시부야 스트림 홀에는 공연뿐만 아니라 목요일, 금요일 양일간 오직 4시간씩만 공개되는 VR Exhibition도 마련되어 있다. 도슨트의 안내를 받아 입구 근처에 있는 각 부스에서 캐나다, 미국, 일본, 프랑스 아티스트들이 XR(eXtended Reality, 확장 현실) 기술을 활용하여 창조한 작품 5편을 감상할 수 있다.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도 완벽하게 작품 세계 안에 머물 수 있는 관객 몰입형 전시(이머시브 아트, Immersive)다. 시간 관계상 두 편 밖에 보지 못했지만, 본 공연 앞부분을 놓치면서까지 무리해서 본 <-22.7℃>의 잔상은 지금까지도 강렬하게 남아있다.

    <-22.7℃>는 '노마딕 일렉트로닉' 음악의 선구자로 불리는 프랑스 프로듀서 Molécule이 북극의 소리를 포착하기 위해 36일 동안 감독 Jan Kounen과 함께 그린란드로 떠난 모험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했다. 작은 배를 타고 유유히 북극해를 유영하다가 별안간 지구 표면 아래로 떨어지고, 노을이 지는 그린란드에서 별이 빛나는 우주로 서서히 떠오르는 경험은 VR이 아니라면 현실에서 실감하기 어렵다. 엔딩씬에서 별에 휘감긴 채 듣는 일렉트로닉 음악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 트랙은 2018년에 발매된 동명의 앨범 중 "Sila"라는 이름으로 발매되어 있다. 아래 Sila의 뮤직비디오와 짧은 다큐멘터리로 제작된 비하인드 씬, 그리고 감독과 프로듀서 두 사람이 같이 출연한 1시간짜리 인터뷰 영상도 함께 남겨두었다. 자동 번역 기능이 조금은 어색하더라도 생생한 작업기를 아티스트의 목소리로 직접 듣는 일은 무척 흥미롭다.

 

"Sila" by Molécule
Behind "-22.7℃" (Short Documentary)
Molécule & Jan Kouren / from Le Forum des Images

 

 

12/09/2022 PLAY 2

 


18:30 ~ 18:55 - Myriam Boucher

    깊은 앰비언트 분위기로 금요일 MUTEK의 막이 올랐다. 작곡가 겸 비디오・사운드 아티스트 Myriam Boucher(캐나다 몬트리올)는 영상과 소리를 결합해 다양한 형태로 작업한다. 예측할 수 없는 자연처럼 Myriam의 작업 또한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 모른다. 자연과 인간이 이루는 관계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는 그녀는 이번에 도쿄에서 <Littoral(연안)>이라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해안 침식, 열팽창, 기후 변화 등에 대한 과학적 데이터를 통합하여 해수면 상승과 관련된 개념들을 오브제와 조명, 물, 현장 녹음 등을 활용하여 라이브로 풀어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무대 안에서 세밀한 사운드로 언어 없는 탐구 일지를 풀어내는 공연이었다.
Pierre-Luc Lecours와 함께 2020년에 공연된 Myriam Boucher의 <Fragments>를 소개한다. 거대한 자연의 조각들을 조금씩 더듬어 음악과 영상으로 풀어낸 작업이다.

"Frangments" by Myriam Boucher & Fierre-Luc Lecours

 


19:15 ~ 20:00 France Jobin & Markus Heckmann
    영화 음악 작곡가이자 사운드 설치 예술가 France Jobin(캐나다 몬트리올)의 오디오 아트는 '사운드 조각품(Sound-Sculpture)'라고 불리고 있다. 1958년생인 그녀는 90년대 중반부터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에서 다양한 건축을 닮은 세심한 시청각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 테크니컬 디렉터인 Markus Heckmann(독일, 캐나다)은 컴퓨터 그래픽의 미적 측면과 빛의 물리적인 형태를 결합한 작업을 추구한다. 그는 아티스트를 위한 영상・설치 작업, KineticLights 애플리케이션 제작, 테크노 이벤트 내 시각 효과 작업 등도 겸하고 있다. 해박한 지식을 겸비한 두 사람은 이번 MUTEK JP을 통해 양자 물리학과 양자 장 이론의 개념과 속성에서 영감을 얻은 과학적 연구를 예술적으로 해석한 프로젝트 <Entanglement(얽힘)>를 선보였다. 아래 영상으로 작품의 일부를 소개한다. 영화의 소재로 다양하게 사용되어 우리에게 조금은 친숙해진 '멀티버스(다중우주)'를 상상하면 작품이 훨씬 쉽게 와닿을 거라 생각한다.

"Entanglement" by France Jobin & Markus Heckmann in MUTEK JP 2022

"Entanglement" by France Jobin & Markus Heckmann

 


20:15 ~ 20:50 YOSHIROTTEN & TAKAKAHN feat. Baku Hashimoto

    그래픽 아티스트이자 아트 디렉터인 YOSHIROTTEN(도쿄)은 영상, 3D 작업, 설치, 음악, 패션 브랜드, 광고, 상업 공간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Baku Hashimoto(도쿄)는 비디오 디렉터, 비주얼 아티스트 및 개발자로 스톱 모션, 생성 예술(generative art) 분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시각 예술 형식을 탐구하고 있다. 이번 MUTEK JP에서 YOSHIROTTEN은 음악 프로젝트 YATT의 파트너인 TAKAKAHN과 함께 "FUTURE NATURE"라는 이름의 그래픽 풍경을 그려냈다. 감사하게도 YATT 유튜브 채널에서 전체 공연 영상을 올려주었다. 아래 링크에서 35분 동안 디지털로 형상화된 새로운 지구를 탐험해 보자. 패션과 광고 분야에서 활동하는 YOSHIROTTEN의 화려하고 감각적인 영상과 이에 걸맞은 TAKAKAHN의 사운드가 감명 깊었다. 

YOSHIROTTEN & TAKAKAHN feat. Baku Hashimoto in MUTEK JP

 


21:05 ~ 21:50 Kopy & VJ BunBun

    밝은 색조와 울트라 텍스쳐, 비트 맞춤형 홀로그래픽 스타일로 대표되는 VJ BunBun(캐나다 몬트리올)의 작업은 30개 이상의 국제 페스티벌・컨퍼런스에서 상영되었다. 그녀는 현재 수백 명의 유명 아티스트와 다양한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 여성 밴드 'Water Fai'에서 수년간 기타리스트로 활동한 KOPY(오사카)는 2015년 솔로 프로젝트로 데뷔한 뒤 다양한 국제무대에서 공연하며 활동을 펼치고 있다. KOPY가 생성하는 리듬은 다소 난해했지만 그녀만의 개성 있는 무대와 VJ BunBun의 감각적인 비주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겼던 공연이었다.

KOPY & VJ BunBun in MUTEK JP 2022 / (c)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22:05 ~ 23:00 Mars89 & HEXPIXELS

    금요일 공연의 피날레는 돌연변이 리듬으로 공상과학 속의 디스토피아를 특출 나게 그려내는 Mars89(도쿄)와 독특한 세계관을 지닌 비디오 아티스트 듀오 HEXPIXELS(도쿄)의 무대로 채워졌다. 이번 MUTEK에서 가장 기대되었던 공연이기도 하다. 도쿄의 언더그라운드 클럽 서킷씬에서도 유망주로 손꼽히는 Mars89의 기괴한 사운드는 HEXPIXELS가 창조한 상상력과 결합해 <Goliath Sound System(골리앗 사운드 시스템>이라는 우주를 즉흥적으로 풀어냈다. 이 공연을 체험하는 동안 외계 도시로 변한 도쿄의 낯선 밤거리를 배회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래에 '보일러 룸'에서 선보인 Mars89의 공연을 덧붙인다.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세계로 마음껏 뛰어들고 싶은 순간, Mars89의 음악이 훌륭한 필터가 되어줄 거라 생각한다.


Mars89 in MUTEK JP 2022 / (c)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Mars89 in Boiler Room

 

 

    5시간 동안 스탠딩으로 만끽한 인생 첫 MUTEK을 멋지게 마쳤다. 앰비언트 사운드로 시작해 강렬한 하드코어 테크노까지, 일렉트로닉이 다루는 무한한 소재를 즐겼던 하루였다. 장르 특성상 전자 장비가 많아 무대와 관객석은 일부 분리가 되어야했지만, 공연들은 현장 분위기에 반응하며 즉석으로 이루어졌다. 공간 안에서 오디오와 비주얼로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차원의 총체적인 전시였다. 아티스트가 다루는 작품이 주가 되고 같은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순간의 영상과 음악에 대해 온몸으로 자유롭게 표출해내는 시간이었다. 내일 있을 MUTEK 공연은 시부야의 Spotify O-EAST 공연장에서 'Nocturne 1'이라는 타이틀로 펼쳐질 예정이다. 예술과 일렉트로닉이라는 장르 안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실험들이 또 어떤 충격을 안겨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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