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세계, 아트 북으로 만나는 경계 없는 상상

2023. 9. 24. 22:30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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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 서너 개와 서툰 그림이 담긴 그림일기를 시작으로, 다섯 살 때부터 30대가 된 지금까지 일기를 써오고 있다. 콜라주 등 다양한 방식을 시도하며 일기는 점차 '오직 나만을 위한 매거진'이 되어갔다. 기록을 책이라는 형태로 처음 엮을 때는 별다른 경험이 없어서 가장 익숙한 보편적인 책 형식에 담아냈다. 숲의 적막과 고요한 세계, 그곳에서 경험하는 일들. 이를 활자로 표현해 읽는 이의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질 수 있도록 애를 썼다. 책이 완성된 후, 나중에 그림책 에디션이 나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혹은 기존 방식이 아닌 뜻밖의 형태를 만나거나.

    '가장 나다운 책'이 어떤 걸까 고민하던 중 부산 중구 독립서점 '피스 카인드 홈'의 프랭코 님과 사진전시를 겸한 독립출판을 기획해 볼 기회가 생겼다. 책 구성을 정한 뒤 온라인으로 회의 및 자료 전달이 진행되었고, 프랭코 님이 편집디자인을 맡아주셨다. 지난 6월, 작은 파일 안에 사진과 글, 활동지가 담긴 첫 <사파> 20권이 세상에 나왔다. 전시 전날 부산에 내려가 당일날 전시 설치 및 책 조립을 마저 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노동집약적인 작업이라 에너지를 바닥까지 끌어모아야 했다. 비용 고민부터 콘텐츠 구성, 실제 전시 공간 기획까지 전체적인 과정을 두루 겪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맨땅에 헤딩하듯 일단 작업을 시작하고 이어가다 보니 이 세계가 조금 더 궁금해졌다. 가을/겨울 시즌을 맞아 두 번째 <사파>를 기획하던 중, 합정의 아트북 서점 "비 플랫폼(B-Platform)" 손서란 대표님의 원데이 클래스가 상상마당 홍대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서울에 머물고 있는 장점을 놓치지 말자는 생각이 들어 바로 강의를 신청했다.

 

펼치면 열리는 아트 북의 세계

    새벽 3시. 경기도 화성의 이름 모를 공터에서 뮤직비디오 촬영 기록 업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3시간 정도 잠을 청한 뒤 오전 9시에 홍대 상상마당으로 길을 나섰다. 잠이 부족하고 눈이 뻐근했지만 생애 첫 아트 북 입문 강의를 앞둔 설렘이 조금 더 컸다. 6층 카운터에서 출석 체크를 먼저하고 7층 아카데미 강의실로 이동했다. 

 

상상마당 홍대 7층 아카데미
강의실 입장! / (c)2023. 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강의 시작 전, 상상마당 직원분의 간단한 OT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강의를 신청한 이유에 대해 돌아가면서 짧게 이야기를 나눴다. 취미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사람, 애니메이션 작가, 동화 작가, 콜렉터 등 분야가 다른 사람들이 모인 자리였다. 표지-면지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제본 형식인 '코덱스(codex)'에 대한 설명을 시작으로 아코디언북으로 불리는 콘서티네 북(Concertine Book), 회전목마와 같은 모습의 카로셀북(Carousel Book), 구멍이 뚫린 홀북(Hole Book), 층층이 깊이감을 느낄 수 있는 터널북(Tunnel Book), 둘둘 말린 형식의 스크롤북(Scroll Book), 한 페이지가 분할되어 독립적으로 넘길 수 있는 등 독특한 형식의 익스퀴짓북(Exquisite Book), 여러 층이 겹겹이 쌓여 제작되는 레이어북(Layer Book), 그리고 그밖에 범주 외의 다양한 책들을 실제로 만져보고 훑어보며 상상의 한계를 깨뜨려보았다. 

다양한 아트 북들
손서란 대표님이 소개해주신 다양한 아트 북들 / (c)2023. 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읽는 사람마다 다른 해석을 끌어내며, 텍스트로 구구절절 말하지 않고, 이미지가 텍스트만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아트 북이 좋은 책이라고 손 대표님은 말했다. e-Book이 처음 나올 때 종이책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하나도 걱정하지 않았다고. 왜냐하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만지고 싶어 하는 촉각 본능이 있으며 오감을 체험할 수 있는 형태는 오직 오프라인 책만이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트 북은 기본적으로 일반적인 책이라기 보다는 '예술'의 영역으로 분류된다. 서양에서 아트 북이 미술품과 마찬가지로 수십만 원, 수백만 원, 혹은 그 이상까지 책정되는 이유도 예술적인 가치와 희소성 때문. 한국 시장에서는 아트 북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열악하지만, 손 대표님은 아트 북의 의미와 가치를 보존하는 일에 사명감을 느낀다고 했다. 가볍고 휴대하기도 편리하지만 충분히 예술로서 가치가 있는 아트 북. 한국 문화 안에서도 제대로 조명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외 메모들

    1.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아트 북 페어"를 꼭 가보세요! 비즈니스 측면이 강한 일반 북페어보다 훨씬 재미난 걸 많이 발견하실 거예요.

    2. 팝업북은 설계가 필요합니다. 이를 구현해주는 직업이 '페이퍼 엔지니어'입니다.

    3. 그림책에서 만큼은 가르치려 하지 말고 그냥 좀 자유롭게.

    4. 의외의 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책.

 

    독일에서는 '베를린 아트 북페어'가 유명하다고 한다. 찾아보니 마침 이번주 금요일과 주말에 베를린 아트 북페어 "MISS READ"가 열리고 있었다. 베를린에서 한국 분이 운영하고 있는 Ein Buch Haus 북갤러리도 알게 되었다. 베를린에 가야할 이유가 또 생겼다.


작업하기 좋은 상상마당 홍대 3층 카페,
"I Got Everything"

    토요일 오후는 어딜가든 붐빌 것 같아 다른 카페를 검색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출석체크를 하고 받은 음료 500원 할인 쿠폰을 쓸 겸 3층 라운지 카페로 갔다. 점심식사를 간단히 해결하기 위해 햄치즈 크루아상과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일반 카페의 1.5배 정도는 되어 보이는 대용량 카푸치노였고, 짭짤한 크루아상도 생각보다 맛이 좋았다. 전기를 쓸 수 있는 기둥 근처에 자리를 잡고 밀려 있던 글 정리를 기분 좋게 시작했다. 오래전 유행한 팝 음악이 두서없이 흘러나오고 여기저기 모임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만, 묘하게 3시간 동안 양질의 집중을 끌어낼 수 있었다. 덕분에 필요한 작업을 기분 좋게 마무리했다. 작업 공간으로 제격인 곳이다.

 

상상마당 홍대 3층 카페I got everything.
상상마당 홍대 3층 카페 / (c)2023. 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비 플랫폼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 중 10월 첫째주 금요일부터 시작하는 북 바인딩 4주 클래스와 10월 마지막주 금요일부터 시작하는 8주 팝업 워크숍을 신청했다. 적지 않은 수강료이지만, 훌륭한 작가님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면 아깝지 않다. 12월 중순까지 이어지는 꽤 긴 여정이다. 나의 기록 생활이 조금씩 전문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글쓰기, 책, 출판은 평생 동안 이어가고 싶은 분야이고, 내가 어떤 분야에 있든 통용될 수 있으니 직접 책을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싶다. 내 안의 이야기들이 어떤 형식으로 세상에 풀어져 나올 수 있을지 기대된다. 선선해진 바람과 함께 마음도 두근거리는 가을이다.

+


    혹시나 책 제본과 아트 북에 관심이 있다면 비 플랫폼의 인스타그램을 확인해보는 것도 좋다. '어랏' 앱에서 비 플랫폼 프로그램을 신청하면 20,000원 할인 쿠폰을 받을 수 있다. 9월말까지 사용할 수 있는 쿠폰이 있고, 10월에는 새로운 쿠폰이 발행될 수 있으니 비 플랫폼 인스타그램을 꼭 확인해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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