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실루엣, 그리고 잊지 못할 밤

2018. 8. 9. 13:47Travel

반응형

2018년 7월 16일 월요일

일요일 저녁, 오클랜드로 돌아갈 채비를 끝마쳤습니다. 보름 만이었지요. 한 달의 절반이라는 시간이 짧을 수도 있겠지만 90퍼센트의 시간이 일로 채워진 15일은 참으로 길게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일이 끝이 나니 무척 후련했어요. 마무리 현장 사진 촬영은 카메라를 소지한 제가 맡았습니다. 광각 렌즈의 과장미 덕분에 사진이 더욱 멋스럽게 찍혔어요.

이제 '웰링턴 - 오클랜드 9시간 드라이브'라는 마지막 관문만 남았습니다. 대낮에 출발할 거라 기대했는데, 또다시 일정이 미뤄져 창밖도 볼 수 없는 깜깜한 밤에야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어쨌거나 하루를 더 낭비하느니 빨리 집에 가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기는 했습니다. 액셀 페달에 남아 있는 힘을 보냈습니다. 짐을 가득 실은 밴의 묵직한 무게, 거기다 저릿한 피곤함과 집에서 쉴 수 있다는 기대감이 버무려져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습니다.

하품이 끊임없이 쌓이자 눈물도 고여있지 못하고 주르륵 흐르네요. 결국 1번 도로를 따라 통가리로 국립공원과 타우포 호수를 지나는 동안 깊은 잠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1번 도로로만 가면 크게 문제 될 게 없는데, 2주 전에 막혔던 구간이 아직도 처리가 덜 끝난 모양이었습니다. 도로가 안내하는 대로 모르는 길로 빠졌습니다. 내비게이션도 새로운 최적의 경로를 찾느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네요. '최적'의 경로가 이 기계에게 무슨 의미인지는 몰라도 우리에게 편한 길은 아니었습니다. 내비게이션은 산길에서 더욱 험한 산길로 우리를 안내했고, 속력이 급격히 줄어들어 몸이 앞으로 기우는 바람에 잠의 미로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지난 몇 달간 어떤 차도 지나다닌 흔적이 없는 길이었습니다. 산사태로 내려온 흙더미들은 도로 곳곳에 퍼져 있었고 길 위에 나뭇잎들이 수두룩하게 떨어져 있었지요. 나뭇가지 위로 어디선가 부러진 나뭇가지가 얹혀 있었고, 왼쪽 옆으로는 어마어마한 높이의 절벽이 솟아 있었습니다. 사고를 당해 구조가 필요한 차량, 혹은 로드킬을 당한 들짐승들이 금방이라도 헤드라이트에 보일 것만 같았습니다. 40킬로미터 이상 속력을 내기가 곤란한 굽은 길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내비게이션 지도를 보니 자잘한 선들이 봉제선처럼 지그재그로 그려져 있네요. 도대체 우리는 어디쯤 있는 걸까요.

지옥의 지그재그 구간을 지나니, 이번엔 안개가 우리를 덮쳤습니다. 별안간 하얀 밤이 펼쳐진 겁니다. 1m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속력을 더욱 줄여야 했습니다. 빨리 도착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도 자연 앞에서는 평정을 되찾는 게 가장 현명한 처사입니다. 운전자의 입장이 아니라서 할 수 있는 마음 편한 소리겠지만, 안개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런 영화적인 미장센에 터져 나오는 감탄을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창문을 열어 차가운 안개를 들이마셔 보았습니다. 새벽 한 시, 깊은 숲 냄새에 정신이 맑아지네요.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안개는 지표면에서 어느 정도만 두껍게 쌓여 있었고 하늘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뚫린 하늘로 믿을 수 없이 촘촘한 은하수가 잠깐 보이다가 순식간에 다시 높은 나무와 산이 시야를 가렸습니다. 답답하게도 울창한 나무들 때문에 한동안 하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곧 산길을 벗어나자 안개도 함께 사라졌고, 우리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수북이 쌓인 별들의 향연이었지요. 불평불만은 어디로 가고 감탄사가 연신 흘러나왔습니다. 구름과 안개가 종종 시야를 가렸기에 하늘이 열렸을 때 사진이라도 한 장 남기고 싶어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하늘이 나의 소원을 들었는지 우리 옆으로 꽤 넓은 갓길이 나왔습니다. 헤드라이트도, 시동도 모두 끄고 잠시 동안 자연의 선물을 만끽하기로 했습니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별 말고는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어요. 땅은 축축하게 젖어있었습니다. 저는 후지필름 카메라 어플을 열어 빠른 속도로 원격 모드로 카메라를 연결했습니다. 삼각대를 꺼낼 시간도 없었지요. 우선은 창문에 올려놓고 찍었습니다. 가장 밝게 보이는 별에 초점을 맞추고 셔터 버튼을 눌렀다. 카메라가 세상의 빛을 끌어모으는 30초 동안 저도 경이로움에 완전히 빠져 있기로 했습니다. 그때였어요.

"거기 누구요?"

갑자기 집 안의 불이 환하게 켜지면서 아프리칸-아메리칸의 억양을 한 사내의 거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아, 밤하늘이 너무 예뻐서 오클랜드로 향하던 길이었는데 잠시 사진을 찍고 있어요!"

최대한 크게 말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나 봅니다. 다만 제가 여성이라는 사실만 전달했을 뿐이었습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요?"

이번에는 동료가 대신 대답했습니다. 멀리서 실루엣이 드러났어요. 그들은 어깨에 총을 둘러 매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누군지 알아보기 위해 점점 가까이 다가왔어요. 마지막 사진이다, 생각하고 불빛이 새어 나오는 집을 향해 카메라를 두었습니다. 신고 있던 신발 한 짝을 벗어서 각도를 높였습니다. 재빨리 셔터 버튼을 누르고 그들을 향해 정중하게 말했지요.

  "늦은 밤 죄송합니다. 오클랜드로 가던 길에 별을 촬영하고 싶어서 잠시 멈췄어요."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한국 사람이에요."

   "어디서 오시는 길인 가요?"

  "웰링턴이요. 일을 마치고 오클랜드로 돌아가는 길이에요."

그들에게 카메라에 은하수가 담긴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 맞아요. 밀키 웨이가 머리 위로 지나가지요."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사시네요."

 "우리는 여기 농장에서 일을 하고 있어요. 2주 후에 떠난답니다."

남아프리카에서 온 두 사람과 우리는 잠깐 동안 별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안전을 위해 총을 맸다뿐이지 그들은 꽤나 따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너무 늦은 밤이라 더 이상 민폐를 끼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미안해요. 좋은 밤 보내세요!"

  "조심히 가요!"

작별 인사를 건네고 차로 돌아왔습니다. 찍은 사진들을 몇 번이고 다시 바라보았어요. 이 밤을 좀 더 기억하고 싶어 휴대폰에 저장된 노래 중에 밤하늘과 딱 어울릴 만한 곡을 하나 듣기로 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푹 빠져 있던 노래였지요. 칸예 웨스트와 애덤 리바인이 함께 한 "Heard 'Em Say". 오래전부터 전주부터 등장하는 전자 피아노 소리가 마치 별이 반짝이는 것 같다고 생각했었거든요. 피곤한 야간 운전에 리듬을 살짝 얹어보았습니다.

 

Kanye West - Heard 'Em Say (Feat. Adam Levine)

 

 

한 밤의 은하수
Owairaka Valley Road, Wharepapa South, New Zealand / ⓒchaelinjane in July 2018
뉴질랜드 은하수
Owairaka Valley Road, Wharepapa South, New Zealand / ⓒchaelinjane in July 2018


정신을 차릴 무렵, 더 늦기 전에 지도를 켜서 이 동네가 어딘지 확인했습니다. 와레파파 사우스(Wharepapa South). 확실히 기록하기 위해 스크린샷을 찍어두었고, 나중에 로드뷰를 이용해 우리가 멈췄던 그 집이 어딘지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남섬으로 내려가기 전, 사진 한 장을 현상해서 짧은 편지와 함께 그 집으로 보내줄 계획입니다. 우리가 그날 힘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당신의 집 앞에서 축복을 받았다고. 잠깐이었지만 평생토록 기억에 남을 순간이었다고. 그날 느꼈던 아름다운 감정을 담아 당신의 행복을 가득히 기원하겠다고. 이방인의 낯선 편지가 그들에게 또 하나의 깜짝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날 밤하늘의 별과 은하수가 우리 앞에 예고도 없이 펼쳐진 것처럼 말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