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의 웰링턴 산책 (1) ─ 고대하던 평범한 주말을 맞이하다

2018. 8. 5. 11:23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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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6일 목요일

6월의 마지막 날부터 7월 15일까지 또다시 웰링턴 출장길에 올랐습니다. 일주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일정이 여러 가지 변수로 인해 두 배가 되었고, 그 기간 동안 현장 두 곳을 모두 마무리해야 하는 까닭에 체력의 한계까지 짜내야 했습니다. 지금껏 보아온 것들을 종합하자면, 한국이든 외국이든 할 것 없이 세상 모든 건축 일은 변수로 인한 딜레이와 씨름하는 게 절반인 듯했습니다. 새벽에 숙소로 가는 길에 본 또 다른 키위 인테리어 회사의 직원도 밴 안에서 고단한 표정으로 쪽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현장이 클라이언트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탓에 종종 현장 외적인 일에 대한 책망도 모두 다 감내해야 할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마감이 매우 급한 상황이라 주말까지 쉬지 않고 일을 했는데, 주말에는 회사와 연락이 되지 않아 클라이언트 관계자들이 현장으로 나와 상황을 곤란하게 만든 적도 있었습니다. 13일 동안 밤낮 바뀌어 꼬박 채운 170시간의 작업. 피로가 뇌 주름 사이로, 눈꺼풀 위로, 어깨 근육 사이로, 손가락 관절 틈새로 두껍게 쌓였다. 미리 마음 먹었던 일주일 정도는 거뜬히 버텼는데, 11일째부터는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이제 좀 쉬어, 몸살 나지 않게 컨디션 조절 잘 해야 돼."

함께 일하는 친구의 권유로 짧게나마 웰링턴 출장이 아닌 웰링턴 '여행'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피로는 잠을 붙들고 늘어져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마침 스무 시간 가까이 일하고 난 아침이 체크아웃이었고, 숙박을 이틀 더 연장하면서 호실이 바뀐 탓에 체크인 시간인 오후 2시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밖에서 버텨야 했습니다.

박물관을 구경하겠다고 기어이 로비까지 갔지만 박물관의 아늑한 분위기는 더욱더 잠에 취하게 만들었어요. 보관소 줄을 기다리다 소파에 앉아 잠들기 직전, 결국 박물관을 나오고 말았습니다. 잠을 깨기 위해 숙소 근처에 있는 좋아하는 카페에 들러 롱 블랙 한 잔을 급히 마셨는데도 여전히 졸음 모자를 뒤집어쓴 기분이었습니다. 눈을 반쯤 감은 상태로 낮거리를 걸어 버티고 버티다 결국 30분 일찍 체크인을 했습니다. 낮에 정신을 잃고 자는 바람에 새벽 2시쯤에는 '피곤하지만 잠은 못 드는 상태'로 몇 시간을 버티다 겨우 잠이 들긴 했지만요.

170시간이면 여기서는 보통 한 달 동안 일하는 시간에 해당합니다. 이번에도 친구 덕분에 짧고 강렬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숙소와 삼시 세 끼 식사비, 생필품비가 제공되어서 돈 한 푼 쓰지 않고 많은 돈을 번 건 꽤 보람찬 일이었지만 그만큼의 피로는 감당해야 할 몫이었지요. 오클랜드로 돌아와서도 다시 정상 패턴으로 완전히 돌려놓는 데에는 일주일 가까이 걸렸습니다.

여행할 정신이 생기다니, 기적이다!

토요일까지 좀비처럼 지내고 나니 신기하게도 일요일의 이른 새벽에는 눈이 거뜬히 떠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유명한 웰링턴 박물관을 둘러볼 컨디션은 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성당에는 꼭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뉴질랜드로 온 뒤로는 제대로 미사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랜만에 감사 기도도 드리고, 성당의 고요한 분위기에 마음을 좀 녹이고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미사가 끝나는 정오까지, 짧더라도 여행자의 기분을 제대로 느껴보기로 했어요.

외출 준비를 마치고 아침 8시가 되기 전에 조용히 숙소를 나섰습니다. 웰링턴의 겨울 아침을 깊게 들이마셨습니다. 어느새 7월이 겨울이라는 인식도 꽤 자연스러워진 것 같아요. 요 며칠간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것 같았으나 잠이 올 때마다 자게 내버려둬서 그런지 그 간극이 정상 범위로 돌아온 듯했습니다. 숙소 앞 빅토리아 스트리트를 따라가면 부둣가로 이어집니다. 주변에 곧 미사가 열릴 성당도 있고 카페도 많아서 이 거리를 오늘 산책의 기준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웰링턴 램튼 하버(Lampton Habour)로 가는 길

대부분의 상점들이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아침 시간이었습니다. 거리 위의 차들과 몇몇 카페의 스태프들만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어요. 밤동안 식어 있던 공기는 곧 아침 햇살에 데워질 것을 아는지 거리 위에 부풀어 올라 가볍게 흔들렸습니다. 부둣가에 가까워지자 화려한 아트 데코가 인상적인 대형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어요.

 

뉴질랜드 웰링턴 거리
Hunter Street, Wellington, New Zealand / ⓒchaelinjane, 2018
뉴질랜드 웰링턴 거리
Hunter Street, Wellington, New Zealand / ⓒchaelinjane, 2018


1930년대, 미국에 대공황이 터지고 국민들의 소비 욕구를 끌어올리려는 듯 정부의 주도 하에 외관이 화려하고 규모가 큰 건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곧 정치·사회·문화적으로 격렬한 변화를 불러일으킬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했고, 전쟁은 뉴질랜드의 디자인 예술 분야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간 이어져 오던 영국의 빅토리아-에드워드 시대의 건축 양식이 저물고, 미국의 아트 데코 디자인이 거리를 물들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전후로는 현재까지 버너큘러(vernacular, 지역 특유의 건축 양식) 건물들이 골목을 따라 자연스레 형성되고 있는 중입니다. 이처럼 뉴질랜드의 건축은 세계 1차 대전 발발 전, 전쟁 중, 전후 시기에 걸쳐 세 번의 변화를 겪어오고 있습니다.

 

뉴질랜드 웰링턴 램튼 하버 전경
Lampton Habour, Wellington, New Zealand / ⓒchaelinjane, 2018
뉴질랜드 웰링턴 램튼 하버 전경
Lampton Habour, Wellington, New Zealand / ⓒchaelinjane, 2018


조금씩 공기의 질감이 달라져서 보니 부둣가가 나왔습니다. 건물 창문에 아침 햇빛이 닿아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어요. 마침 스파크 무료 와이파이*도 신호가 시원하게 잡힙니다. 좋아하는 음악을 스트리밍으로 마음껏 들으며 산책을 즐기는 게 얼마만인지요. 오리엔트 베이로 잔잔하게 들어오는 물결이 호수를 바라보는 것 같은 편안함을 안겨주었습니다.

*뉴질랜드 스파크(Spark) 사의 요금제를 쓰면 FreeWifi 부스 근처에서 무료 와이파이를 하루에 1GB씩 쓸 수 있다.(2018년 기준)

 

뉴질랜드 웰링턴 램튼 하버
Lampton Habour, Wellington, New Zealand / ⓒchaelinjane, 2018


아무리 부둣가라도 뉴질랜드라서 그런지, 이렇게 냄새가 심하지 않고 물이 맑은 항구는 처음이었습니다. 펭귄 그림으로 가득한 배를 발견하고는 역시나 예술의 도시답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오리엔트 베이의 해안선을 따라 테 파파 박물관(Te Papa Museum), 웰링턴 박물관(Wellington Museum), 하버사이드 마켓(Habourside Market), 시티 갤러리(City Gallery Wellington) 등 둘러볼 곳들과 각종 레스토랑, 카페가 풍부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게다가 곳곳에 프리 와이파이존까지! 산책을 즐기기에 가장 완벽한 도시 중 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전 11시 미사 시간까지 2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아침 해를 보고 나니 맛있는 빵과 커피로 텅 빈 배를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지더라고요. 그걸 상상하고 실현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웰링턴에서 만끽하는 작은 아침의 발걸음마다 감사한 마음이 더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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