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라글란에서 생일을 (1) ─ 캠핑 여행

2018. 8. 3. 10:14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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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25일 월요일

 

처음으로 외국에서 맞이하는 생일

지난 토요일, 낯선 외국 땅에서 생일을 맞았습니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있네요. 하긴 두 달 전 제 일상을 전부 뒤엎은 것으로 매일이 인생의 새로운 페이지─단순히 새 페이지가 아니라, 종이의 재질과 두께, 펜의 종류와 잉크마저 모두 바뀐─ 위에 있으니 딱히 더 새로울 게 없긴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별 수 없이 생일이라는 특별한 날짜를 부여받았기에, 늘 똑같이 해가 뜨고 지더라도 그날만큼은 00시 00분과 23시 59분 사이의 시간 토막을 조금 더 선명하게 의식하게 되지요. 뉴질랜드에서의 6월 23일은 새로운 시간들 사이에서 작은 오름처럼 솟아올라 있었습니다.

생일날 아침에 캠핑 짐을 싸기 전, 가족 카톡방에 장문의 편지를 남겼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경험할 수 있게 낳아주셔서 감사하다고, 두 분이 기대하시는 대로 성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내가 바라는 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믿고 놓아주셔서 감사하다고, 건강히 잘 계셔주셔서 정말로 정말로 감사하다고. 부산과 남태평양에서 답장이 날아온 건 이미 카카오톡 데이터를 끄고 출발한 뒤였습니다. 사랑한다, 우리 딸로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메시지를 읽은 건 집에서 167km 정도 떨어진 어느 해변가에서였어요. 물론 '생일맞이 잔소리'도 빠지지 않고 들어 있었지만.

자꾸 뭉클해져 오는 마음을 바닷바람에 실어 보냈습니다. 지금 제가 살아내고 있는 삶이나 엄마와의 개선된 관계, 아빠의 한결같은 사랑과 지지, 새로운 땅에 서 있는 이 모든 게 기적처럼 느껴집니다. 생일은 나를 사랑해주고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들을 위해 더욱 잘 살아보겠다고 다짐하는 날인 모양입니다.

 

라글란의 나루누이 비치(Ngarunui Beach)

예전에 대만 타이동 동허에서 독일인 의사와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곧 뉴질랜드로 갈 계획이라 말했더니 자신도 아내와 뉴질랜드로 서프 트립을 떠난 적이 있는데 한 지역이 특히나 좋았다며 제 다이어리에 지명을 써주었지요.

  R A G L A N.

그리고 생일을 맞아 그곳을 찾아가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구글 맵스를 켜보니 약 2시간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어요. 구불구불한 산길 운전이 힘들긴 했지만 요즘 운전이 재밌는 시기라 지루한 줄 모르고 달렸습니다.

해가 지는 라글란 바다 풍경
Ngarunui Beach, Raglan, New Zealand / ⓒ chaelinjane, 2018


구글 맵스에서 'Raglan'을 검색한 뒤 내비게이션을 따라가다 보면 나루누이 비치(Ngarunui Beach) 주차장까지 안내를 해줍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 80%가 수트를 입고 있습니다. 집에서 싸온 샌드위치 도시락을 챙겨서 해변으로 내려갔습니다. 바다에만 오면 참을 수 없는 가려움을 남기는 물벼룩에 질려서 이번엔 두꺼운 스타킹에 부츠까지 완전 무장을 하고 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스타킹 표면 위에서 헛입질을 하다가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물벼룩을 보며 승리의 쾌감을 맛보았습니다. 내가 생일날까지 물리기는 싫어!

 

 

 

서핑을 배우는 사람들과 해변으로 승마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
Ngarunui Beach, Raglan, New Zealand / ⓒ chaelinjane, 2018
완벽한 낙원
Ngarunui Beach, Raglan, New Zealand / ⓒ chaelinjane, 2018

 

해변과 바다를 촬영하고 커다란 나무 기둥에 앉아 글을 썼습니다. 어느새 비구름이 물러가고 햇살이 비치고 있었지요. 바람은 무척 찼지만 햇살 덕분에 나른해졌습니다. 그제야 운전의 피로감이 몰려오더군요. 새벽에 일찍 잠이 깨어 슬슬 졸음이 찾아왔습니다. 에이, 이러면 곤란한데. 나무 기둥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다가 일정하게 움직이는 구름이 눈앞에서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까르르 웃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습니다. 순간적으로 눈앞의 자연이 비현실적으로 선명하게 느껴져서 마치 시력이 5.0까지나 회복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오후 네 시 반, 곧 해가 질 시간이었습니다. 비치에서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마누 베이(Manu Bay)라는 스팟도 확인해봤는데 촬영하기에도, 접근하기에도 아주 좋은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그곳은 내일 아침에 다시 가 볼 생각입니다.

 

별빛 아래 조촐한 생일상과 모험의 중간 점검 시간

루카한테서 혼다 오디세이를 넘겨받을 때 휴대용 가스버너와 새 부탄가스 2통, 식기구들을 잔뜩 받았습니다. 제대로 된 캠핑장에서의 캠핑은 뉴질랜드가 처음이라, 4월 초 부엌이 완벽하게 갖춰진 오포우티어의 캠핑장에서도 입에 맞지 않는 인도 라면만 끓여 먹고, 나머지 주린 배는 숲의 맑은 공기로 대신 채우고 왔습니다. 이번에는 일인당 $10 하는 저렴한 캠핑장을 찾았습니다. 오포우티어 캠핑장의 절반 가격이라 그때처럼 쾌적한 부엌을 기대할 수는 없고, 루카가 준 휴대용 가스버너를 믿어보기로 했지요.

5분 거리에 떨어진 마트에서 쌀알 모양의 리조니 파스타와 닭꼬치를 사 와서 본격적으로 세팅을 하려는데,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졌습니다. 열심히 프라이팬과 사용할 식기구들을 씻어 왔건만 휴대용 가스버너는 안 쓴 지 오래되어서 가스만 세고 점화는 되지 않는 상태였어요. 보관이 잘 되어 있길래 문제없을 줄 알았는데, 역시 뭐든 미리 확인을 해야 합니다. (중요!) 따로 라이터도 없어서 해는 어느새 다 져 있었습니다. 옆 캠핑카에서 빌려볼까 생각도 했지만 다들 식사 시간이 비슷해서 한창 사용 중인 것 같았어요. 일단은 급한 대로 신라면으로 봉지 라면을 하나 끓여 먹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24시간 보온 보냉이 되는 스탠리 클래식 진공 보틀은 아직도 끓는 물의 열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생일인데 라면 하나 먹자니 침울함을 감출 수 없었지만 최대한 좋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이놈의 라면은 내 속도 모르고 왜 그렇게 맛만 있던지요.

 

 

스탠리 클래식 배큐엄 인슐레이티드 와이드 마우스 보틀 보온 보냉병

COUP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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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질랜드에서 정말 요긴하게 썼던 스탠리 클래식 진공 보온병입니다. 쿠팡에서 직구로 구매하실 수 있네요!


그래도 생일을 라면으로 때우는 건 영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분간 외식은 꾹 참으려고 했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까지만 먹어보겠습니다!(뉴질랜드는 사 먹는 음식들이 비싸서 웬만하면 요리해 먹으려고 다짐을 했더랬죠.) 트립어드바이저(TripAdvisor)에서 괜찮은 터키식 케밥 레스토랑을 찾았습니다. 아까 갔던 슈퍼 근처가 번화가였기 때문에 그쪽에 음식점들과 상점들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상품을 뜯지 않은 상태라 아까 슈퍼에서 구매한 것들은 환불하고 레스토랑으로 향했습니다.

허머스 소스와 스위트 칠리소스를 더한 Mixed Meat 케밥 샐러드 라이스와 고로케 비슷한 팔라펠을 시켰습니다. 이 근방에서 인기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료 준비를 새로 하느라 꽤 간단해 보이는 패스트푸드가 무려 40분(...)이나 걸려서 나왔습니다. 음식 준비가 늦어지면 멘붕이 올 텐데, 사장님이나 아르바이트생이나 얼굴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담담하게 자신의 속도로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배고픈 손님들을 앞에 두고 저렇게 초연할 수 있다니, 그 초강력 멘탈을 저도 좀 빌려 쓰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옆집에 있는 피시 앤 칩스에서 튀김 몇 개를 함께 사서 캠핑장에 도착하니 거의 여덟 시가 다 되어 있었습니다.

식사는 오디세이의 앞 좌석에서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휴대폰 거치대를 머리 뒤 에어컨에 꽂아서 휴대폰 플래시를 켜 조명으로 활용했습니다. 꼭 배가 고파서 그런 건 아니었지만 터키식 케밥은 입에 아주 쏘옥 맞았어요! 종이 포장지 속에 들어 있는 피시 콤보에는 생선 튀김이 들어 있었는데 웃기게도 할머니 제사 음식이랑 맛이 똑같았습니다. 피시 앤 칩스의 원조는 우리 조상님들이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참 맛있게 먹었습니다. 특별히 소금을 덜 넣어 달라고 부탁해서 간도 딱 적절했지요. 집에서 가져온 소비뇽 블랑 팩 와인으로 축배를 들며 앞으로 어떤 삶을 살지 생각 정리를 하기로 했습니다.

뉴질랜드가 다 좋은데 집세로 지출해야 하는 돈이 아까운 건 사실이었습니다. 세 들어 살면 주당 $200 정도가 드는데(보증금으로 2주치 방세 $400, 한 달 지내는 데 $800) 나중에 집 한 채라도 빌리는 날이 오면 이것보다 두세 배는 더 들 것 같습니다. 이 나라가 과연 어마어마한 집세를 감당하면서 살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라이프 스타일에 맞는 생활이 가능한지 조금 더 객관적으로 따져 보며 지내보기로 했습니다. 

Te Kopua Whanau Camp, Raglan, New Zealand / ⓒ chaelinjane, 2018
Te Kopua Whanau Camp, Raglan, New Zealand / ⓒ chaelinjane, 2018


와인 기운에 잠이 솔솔 왔습니다. 양치하러 화장실에 갔다가 별이 총총 박힌 밤하늘을 보고는 차에 도로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Dancing in the Moonlight' 노래를 틀어놓고 카메라를 챙겼습니다. 굵직하게 떨어지는 별똥별도 목격했어요. 얼마 남지 않은 카메라 배터리를 다 쓸 때까지 사진을 찍다가 오늘 하루를, 나의 생일을 마감했습니다. 좀 더 마음껏 촬영하고 싶었지만 내일을 위해 새 배터리를 남겨두어야 했다. 약간의 아쉬운 기분이 꽤 마음에 들었다.

한국에 돌아와 가장 뼈저리게 후회하는 것은, 당시에는 '차량용 카메라 배터리 충전기'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ㅠㅠ)
차로 이동하는 동안 배터리를 충전할 수 있었다면 좀 더 마음 졸이지 않고 마음껏 사진을 찍었을 텐데요! (ㅠㅠ)


더 여행하고 더 경험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쉽지는 않겠지만 한계에 부딪치고 조금씩 더 넓혀 가고 싶습니다. 생일을 맞은 이 시점에서, 모험을 하기로 결심한 그날의 제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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