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링턴 여행, 웰링턴 '출장'이 되다

2018. 8. 1. 17:33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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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9일 토요일

 

웰링턴으로

웰링턴에서 일손이 급히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고 원래는 여행으로 계획했었다가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회사에서 지원해준 비행기 티켓이 이메일로 날아왔어요. 수요일 오후 네 시 비행기였습니다. 그전까지 하던 글 작업을 모두 마무리해야 했어요. 마감시간이 코 앞에 찾아온 글 노동의 시작이었습니다. 열심히 준비한 OO프로젝트 첫 번째 이야기를 떠나기 전날 발행했고, 여행 짐은 당일 날 아침에나 챙길 수 있었습니다. 가뜩이나 생각이 느린데 꾸물거릴 시간이 별로 없어서 평소보다 생각 회로를 몇 배속으로 가동할 수밖에 없었어요. 웰링턴이 많이 춥다고 들었는데, 도대체 얼마나 추운지 몰라서 껴입을 수 있는 얇은 겨울옷들을 배낭에 넉넉하게 챙겼습니다. 사실, 옷도 별로 없어서 있는 겨울옷을 그냥 다 챙겨 넣은 거나 다름없었지만요. 카메라 트라이포드와 렌즈까지 꼼꼼히 챙기고, 남아 있는 채소를 점심때 다 삶아서 먹었습니다. 역시 나처럼 서두르는 걸 싫어하는(못하는) 사람은 생각해 둔 시간보다 1시간 빠르게 목표를 잡는 것이 좋습니다.

 

Auckland City, New Zealand / ⓒ chaelinjane, 2018


노던 익스프레스(NEX) 버스를 타고 종점인 Britomart에 내려서 1km 정도 걸어 올라가다 보면 스카이 시티 빌딩 1층에 있는 '인터시티(InterCity) 스카이 버스 터미널'이 나옵니다. 가는 길에 종종 표지판이 보이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현금을 바로 내고 타려다가 예매가 필수라길래 바로 앞 매표소에서 13달러에 티켓을 구매했습니다. 직원이 예매 정보가 프린트된 종이를 건네줬는데 인터시티 버스를 탈 때는 이 종이를 준비해 가는 것이 좋아요. 프린트를 하기가 힘든 상황일 경우 저처럼 현장에서 바로 예매를 하는 게 가장 편리합니다. 공항까지 30분 정도 걸려서 2시에 도착했습니다. 미리 웹 체크인을 해놓은 상황이라 시간 여유가 충분했어요. 덕분에 배탈난 배도 잘 해결하고 기내 수화물 7kg 무게 규정도 맞출 시간이 생겼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쯤엔 비구름이 어느 정도 걷히고 창문으로 빛이 비쳤습니다. 온 나라에 비구름이 가득해 별다른 풍경은 보지 못했지만, 미지의 도시에 대한 기대감만으로 충분했지요.

 

긴급 투입 24시!

Wellington, New Zealand / ⓒ chaelinjane, 2018


아는 분의 인테리어 일을 돕기 위해 웰링턴에 머무는 36시간 동안 총 23.5시간을 일했습니다. 오클랜드로 돌아가는 금요일까지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 해놓아야 하는 상황이라 중요한 일은 원래 직원들이, 시간 잡아먹는 쉬운 일들은 제가 맡았습니다. 여행이 아니라 '일'이라고 받아들였기에 도착한 날부터 마지막 날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긴급 투입 인력으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은 톡톡히 해내고 싶었습니다.

<작업 일지>

  • 인테리어 나무 벽체 5개 무늬 홀 샌딩하기
  • 커팅된 나무판 20여 개에 CFP 칠하기
  • 못 자국 있는 곳에 나무색 필러 채워 넣기
  • 아트 월 4개에 CFP 칠하기
  • 중간중간 버큐밍 & 정리
  • 테이핑 및 비닐 떼기
  • 점심 & 저녁 사 오기
  • 현장 바로 뒤에 있는 버닝스(대형 자재 마트)에서 필요한 자재 사 오기


늘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온몸을 사용하는 일을 하니 새로운 활기가 돌았습니다. 작업등과 블루투스 스피커가 함께 달린 신박한 아이템이 있었는데, 절반의 시간은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을 수 있어서 더욱 신이 났네요.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칠 작업이 난이도가 가장 높았는데, 칠은 5%의 기술과 95%의 정성으로 이루어진 다기에 진땀까지 흘리며 온 집중을 다했습니다. 결과물에 다들 만족스러워하셔서 뿌듯했습니다. 예전에 친구들이 한국에서 타이니 하우스를 지을 때 저도 옆에서 이것저것 거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작업 중간에 제때 정리해주는 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익히 들어왔기에 이번에도 작업이 끝나면 청소와 주변 정리를 하는 식으로, 놀리는 시간 없이 부지런히 움직였습니다. 헷갈리기 쉬운 자재들도 제법 똑똑하게 잘 사 와서 뜻하지 않게 칭찬을 많이 들었네요. (허허) 함께 한 사람들이 참 착한 분들이었습니다.

금요일에는 정오까지 웰링턴 공항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목요일에는 새벽 3시까지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잠을 많이 못 잔 터라 저는 새벽 1시가 넘어갈 때부터 이미 반쯤 정신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밤까지 꾸역꾸역 있었던 게 대학생 때 시험 준비한 이후로 참 오랜만이었습니다. 두 직원 분들의 쾌적한 작업을 위해서 정신력을 끌어올려 톱밥과 쇳가루를 청소기로 빨아들였습니다. 그날 한 분은 에너지 드링크 두 캔으로 밤을 꼬박 새우셨습니다. 밤새고 마무리하신 작업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완벽한 마감이었습니다. 역시, 완벽을 지향하는 꼼꼼한 사람들은 작업 속도가 더디다가 마감날에 몰아서 성과를 내는 방식을 가진 경우가 많은가 봅니다. 그런 방식이 건강에는 좋지 않다는 걸 본인도 알고 계셨지만 이미 오랜 세월을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오신 분이라 바꾸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네요.

 

 

어느 노숙인 할머니의 버스킹

밤의 웰링턴 거리
Wellington, New Zealand / ⓒ chaelinjane, 2018

 

목요일 늦은 밤, 이 회사 거래처의 스시 가게 사장님 한 분이 비닐봉지에 초밥을 한가득 사 오셨습니다. 꺄! 스시라니! 팔고 남은 스시를 전부 다 가져오신 것 같았어요. 문제는 우리가 그날 저녁을 너무나 배부르게 먹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꾸역꾸역 먹었는지 소화가 안되어서 자칫 잘못하면 체기가 올라올지도 모를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이때 하필 스시라니. 한 입 먹고서 도저히 입에 갖다 델 수가 없었습니다. 직원 한 분은 안 좋은 기억 때문에 밖에서 파는 스시는 절대로 드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직원분이 열심히 먹었는데도 열 박스가 넘는 비닐 포장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놔둬봤자 다 상할 텐데. 어쩔 수 없어, 버려야지 뭐."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버려야 한다는 말에 왠지 모를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거리에 있던 수많은 노숙인들이 생각났습니다. 웰링턴에는 온 거리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노숙인들이 많았는데 기부를 거절하는 사람도 웃는 얼굴, 구걸을 하는 사람들도 행복해 보이는 요상한 도시였지요.

  "그럼 저 이거 한 박스만 가져갈게요!"

체기가 더 오르기 전에 좀 걷다 올 생각이었습니다. 거리에서 만나는 노숙자 아무에게라도 아직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스시박스를 건네주고 싶었습니다. 갑작스레 쏟아진 비에 평소에 길거리에 앉아 있던 노숙인들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더라고요. 길을 건너 꽤 멀리까지 걸었는데 정말이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돌아오는 길에, 우리가 있던 현장 바로 앞 술집 근처에서 한 노숙인 할머니가 짐가방들을 줄줄이 세워두고 스피커에 마이크를 연결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로 몸을 좌우로 흔들흔들 거리며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계시더군요. 술집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와 함께, 주위에 술 먹고 흥에 겨운 사람들이 하도 떠들어서 할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전혀 알아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멀리서 지켜보다가 주섬주섬 할머니께 다가갔어요.

  "저녁 먹으려고 산 건데 너무 많이 남았어요. 이거 선물이에요."

할머니는 내 손에 든 걸 보시고는 "Oh, Japanese Sushi!" 하고 기뻐하셨습니다.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할머니를 보자 나의 체기도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지요. 여전히 엄청난 양의 스시 도시락이 남았는데, 그건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노숙인들 대여섯 명이 함께 잠을 자고 있던 구역에 살포시 놔두고 왔습니다. 멀쩡한 음식을 버린다니요. 조금만 둘러보면 버릴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을.

 

예술가들의 도시, 웰링턴

일만 하다가 돌아가는 것을 통탄해할 만큼 웰링턴은 매력적인 도시였습니다. 아침이든 밤이든 할 것 없이 활기와 웃음이 넘치는 사람들. 오클랜드가 정직한 법학도 같은 분위기라면 웰링턴은 언제든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날 줄 아는, 실험적인 성향을 가진 예술가의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이렇게 멋진 도시가 수도라니, 뉴질랜드가 새롭게 보일 정도였어요. 제가 동경해 마지않는 파리의 거리를 닮았달까. 공항에서 91번 버스를 타고 코트니 플레이스에 내린 순간부터 이 도시는 강력한 매력을 발산했습니다.

여기 직원분이 최고로 뽑은 카페가 두 곳 있었습니다. 그중 한 곳인 Lamason은 힙하기로 소문난 카페였지요. 오전 여덟 시가 되기 전인데도 이곳에는 무척 마음에 드는 클럽 음악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EDM이 아니고 그루비한 음악들! 커피를 마시던 한 여성분은 바에 앉아 거의 춤을 추다시피 신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카메라 프레임에 느닷없이 난입해 포즈를 취하는 바리스타와 홀 스태프 모두 아침부터 이미 텐션의 정점을 찍은 밤거리의 사람들처럼 신이 나 있었습니다. 이렇게 장난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 플랫 화이트 커피의 맛은 가히 최고였습니다. 그래, 이런 게 진짜 멋이지.

 

배전함도 힙한 웰링턴
Wellington, New Zealand / ⓒ chaelinjane, 2018


길을 걷다 보면 웃음을 자아내는 요소들이 심심찮게 숨어 있습니다. 장난기로 가득한 도시 속에 숨어 있는 깨알 같음이 어쩔 수 없이 이 도시의 매력 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것 같아요.

 

웰링턴을 떠나며

 

웰링턴 공항
Wellington Airport, New Zealand / ⓒ chaelinjane, 2018

 

연간 평균 시속 29km의 바람이 부는 Windy City 웰링턴은 뉴질랜드에 와서 처음으로 한기를 느끼게 했습니다. 손끝이 너무 시려서 장갑이 필요할 정도였지요. 남섬의 산 지형과 북섬의 아랫부분이 터널을 만들어내는데, 바람이 좁은 쿡 해협을 쥐어짜듯이 통과하면서 이렇게나 바람이 심하게 부는 것이라고 합니다. 비록 미친 듯이 춥지만 저는 오클랜드보다 웰링턴이 제 색깔에 훨씬 잘 맞는 것 같았습니다. 진심으로 이 도시에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네요.

금요일에 드디어 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나 빨리 이 도시와 작별이라니. 공항까지 가는 택시 안에서 보는 풍경이 마지막 시티 투어였습니다. 제가 머물던 기간에 마침 웰링턴 재즈 페스티벌(Wellington Jazz Festival)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아트홀과 100여 개가 넘는 레스토랑과 펍에서 공연이 열렸다고 해요. 이걸 못 보고 온 것도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다음에는 일이 아닌 여행으로, 좀 더 따뜻한 계절에 이 도시를 다시 찾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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