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리 푸카푸카(Whare Pukapuka), 뉴질랜드 도서관 탐험

2018. 8. 1. 14:52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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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3일 목요일

모험이라고 해서 항상 어딘가로 이동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앉은 곳이 어디든 시공간을 단숨에 초월할 수 있는 모험이 있지요. 필요한 것은 언어 능력과 상상력, 그리고 약간의 여행비. 인간으로 존재하면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저렴하면서도 가성비 좋은 모험은 꽤 오래전에 우리의 기록 본능에 의해 탄생했습니다. 바로 타인의 기록을 읽어내는 일, '독서'입니다.

한 달 동안 글을 쓰면서, 출력이 아닌 입력에 대한 강한 허기를 느꼈습니다. 전자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도 하고 웹 상에 쓰인 타인의 기록들을 아무리 읽어도 좀처럼 허기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실물'이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인쇄된 글자를 읽으며 종이의 감촉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그제야 도서관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좋은 생각을 왜 이제서야 했을까요?

 

임시 번호 발급받기

우선 오클랜드 도서관 협회(Auckland Council Libraries)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회원가입을 했습니다.

  • 오클랜드에 거주하거나 세금을 내는 18세 이상의 성인
  • 오클랜드에 사는 18세 이하의 어린이와 10대
  • 학교 기관, 사업 기관, 보육원, 요양원
  • 오클랜드 거주자가 아니거나 세금을 내지 않는 사람(Out of Zone)

이상의 네 가지 분류로 가입을 할 수 있는데 저는 Adult탭으로 들어갔어요. Out of Zone으로 가입하면 1년에 $165.30, 6개월에 $82.60, 3개월에 $41.30을 지불하고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2018년 기준) 가입하니 바로 임시 번호가 발급되었습니다. 이 번호로는 2권까지만 빌릴 수 있어요. 실물 카드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도서관에 직접 가서 사서에게 문의해야 합니다.

 

나의 홈 라이브러리, 오레와 도서관

뉴질랜드 오레와 도서관
Orewa Library, Auckland, New Zealand / ⓒ chaelinjane, 2018


다음 날 오레와 비치에 갔습니다. 주차는 이곳에 하고 잠시 바다를 본 후 구글맵에서 미리 찾아놓은 오레와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비치 주차장에서 7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어요. 사실 뉴질랜드 운전 면허증을 발급받으면서 냈던 50여 달러가 조금은 아깝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서 신분증으로 정말 유용하게 잘 쓰고 있습니다. 사서에게 카드를 발급 받으러 왔다고 말하고 운전 면허증을 보여주었습니다.

  "혹시 이름과 주소지가 찍힌 우편이 있나요? 요금 청구서라든지, 은행 계좌 증명서라든지."

4월 초에 온라인으로 IRD넘버를 발급 받으려고 사진을 찍어두었던 계좌 증명서를 찾아서 보여주었는데, 아뿔싸, 이전 주소지(임시로 머문 첫 숙소)가 적혀 있었다는 걸 깜빡했습니다. 사서에게 사정을 설명하니 다음에 꼭 가져오라는 말과 함께 카드를 발급해주더라고요. 세 가지 카드 중에 마오리 문신을 한 나무와 꿀벌이 생글생글 웃고 있는 카드를 골랐습니다. 뒷면에 서명까지 끝내니 친절한 사서가 도서관 이용과 관련된 팸플릿을 한 가득 챙겨주었어요.

 

도서관 카드
Orewa Library, Auckland, New Zealand / ⓒ chaelinjane, 2018
Orewa Library, Auckland, New Zealand / ⓒ chaelinjane, 2018


와리 푸카푸카(Whare Pukapuka). 귀여운 어감의 이 단어는 마오리 언어로 '도서관'이라는 뜻입니다.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보드게임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을 정도로 분위기는 자유로운 편입니다. 어른들은 대체로 아이들의 목소리가 크든 말든 본인의 시간에 집중했습니다. 책을 훼손하거나 기물을 파손하는 게 아닌 이상 아이들이 시끄러운 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문화인가 봅니다. 오히려 그런 분위기가 도서관을 더욱 친근하고 편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코너마다 곳곳에 한 명씩 이용할 수 있는 책상과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여러 책상이 몰려 있는 스터디 공간과 개별로 독서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분리한 것이 마음에 들었어요. 도서관에서는 기기 하나당 하루에 1GB씩 와이파이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어서 얼른 인터넷을 연결해두었습니다. 설레는 기분을 참아낼 수가 없었어요. 모든 카테고리의 책장을 한 번 다 훑어보고 사진책들이 모여 있는 책장으로 가서 오래 머물렀습니다.

 

 

Barney Brewster의 사진책
Orewa Library, Auckland, New Zealand / ⓒ chaelinjane, 2018

 

볕이 잘 드는 책상으로 가져가서 읽은 첫 책은 뉴질랜드 사진가 바니 브루스터(Barney Brewster)의 장노출 사진집 <Perfect Evening>입니다. 오클랜드에서 멀지 않은 곳들에서 촬영한 것이라고 하네요. 그가 사진을 찍는 기법인 Moonlight Photography에 대해서도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대체로 제가 좋아하는 느낌의 사진들이 많았어요. 장노출 사진은 시간의 흐름을 담아내서 회화적으로 표현하기에 좋습니다.

"While the tripod limits your mobility, it allows some potentially awesome results, unobtainable by hand or in the bright light of day." 

─ Barney Brewster

"삼각대는 당신의 움직임을 제한합니다. 하지만 손으로 한 촬영이나 대낮의 밝은 빛에서는 얻을 수 없는, 잠재적으로 훌륭한 결과를 허용하지요."

─ 바니 브루스터

 

작가는 조지 오웰의 문장을 "Two-legs good, three-legs best!"(두 다리는 좋다, 세 다리는 더욱 더!)라고 패러디하며 삼각대를 이용한 사진 촬영의 유용함을 설명합니다. 이 문장을 다이어리에 옮겨 적고는, 차에 놔둔 삼각대를 더욱 적극적으로 가지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시간쯤 지나고 도서관을 나오려던 찰나, 선반에 놓여 있던 책 한 권에 마음이 빼앗겨서 결국 빌려왔습니다.

 

도서 대출
Orewa Library, Auckland, New Zealand / ⓒ chaelinjane, 2018


켄트 하루프(Kent Haruf) 작가의 여섯 번째 소설이자 유작인 『Our Souls at Night』 입니다. 찾아보니 한국에는 『밤에 우리 영혼은』이라는 제목의 번역본으로 2016년 10월에 출간되어 있었습니다. 도서 대출 기간은 무려 한 달 가까이나 됩니다.(오예!) 한 번에 빌릴 수 있는 책은 35권. 35권이라니! 무슨 특권인가 싶을 정도로 기간도 권수도 여유롭습니다. 오클랜드 만세!

책을 읽으면서 해변으로 걸어갔습니다. 담담한 문체와 서정적인 묘사가 마음에 들어서 책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대로 해변으로 가서 책을 계속 읽었습니다. 책의 내용과 분위기에 딱 맞는 곡이 생각나서 음악을 틀어 놓고 싶었지만 남아 있는 데이터가 얼마 없네요. 마음 속으로 그 노래를 떠올리며 읽었습니다.

 

밤에 우리 영혼은
Our Souls at Night / ⓒ chaelinjane, 2018


도서관 카드 하나 만들었을 뿐인데, 이렇게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듭니다. 제가 읽을 수 있는 책의 가치를 비용으로 따지면 아마 평생 벌어도 얻지 못하는 금액일 것 같아요. 비로소 독서에 대한 허기가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책은 오래된 종이 냄새를 맡으며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게 최고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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