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후기] <사적인 파라다이스(2021)> 사진전 / 해운대 브루커피

2022. 2. 6. 09:00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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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줌의 평온


밤새 바다를 표류한 사람에게 따뜻한 온기가 절실하듯 태양빛에 오랫동안 데워진 모래 속으로 파고들고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슬픔과 불안의 주위는 습도가 높고 서늘해서 이 감정 구간에 들어설 때면 언제나 마음을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온기가 사라지지 않는 곳.
방전된 내가 기운을 회복하는 섬.
외부의 영향 없이 나의 의지로 영원히 존속할 수 있는 낙원.

고대 사람들이 시나 연설을 암송하기 위해 기억의 궁전(Mind Palace)을 이용하는 것처럼 나는 내부에 추상적인 섬을 만들어 평온을 얻기 위한 재료들을 모아두기로 했다. 그래서 일상과 여행지에서 조금씩 떼어낸 평온한 순간을 뭉쳐 자그마한 섬을 조성했다. 그 섬에는 좋아하는 음악이 종일 나오고 보고 싶은 영화 장면이 반복되며 마음에 새기고 싶은 문장들이 야자수에 주렁주렁 걸려 있다. 2015년, 힘든 시기를 좋은 에너지로 극복하기 위해 시작한 <사적인 파라다이스> 프로젝트는 시간이 흐를수록 나를 살리는 자양분이 되어주고 있다.

돌이켜보니 내가 느끼는 평온의 근원은 대부분 '몰입'과 관련이 있다. 타인의 작업물에 매료되는 순간도 있지만 내가 직접 생산에 관여할 때는 조금 더 묵직한 몰입이 펼쳐진다. 글을 쓰거나 사진을 담을 때, 그리고 가끔 그림을 그릴 때 나는 몰입의 계단을 통해 내면에 있는 낙원으로 침잠한다. 부지런한 패들링 끝에 서퍼가 파도와 하나가 되듯이, 높은 속력으로 구름을 헤쳐나간 비행기가 안정적인 항로에 진입하듯이, 현재의 작업에 몰두하다 보면 어느새 낙원의 한 가운데에 존재하고 있다. 특히나 사진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시선과 호흡의 영역에서도 총체적 몰입을 끌어낸다.

사진을 찍는 행위가 대상과 사건에서 거리를 두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나에게 사진은 시간과 공간에 밀착하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주변 세계에 스며들어 있는 평온을 발굴하고 그 순간을 기록한 사진에서 평온을 재추출하는 것. 이러한 '감정의 전이' 방식을 통해 사진 속에서 감정을 회복하는 법을 터득하고 있다.

자기 몫의 평온을 수집하기 위한 여정


2018년 4월부터 2019년 4월까지 1년 동안 뉴질랜드를 탐험할 기회가 생겼다. 마냥 어린 나이가 아니었기에 선택의 갈림길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분명하게 포기해야 하는 것들과 어쩌면 얻을지도 모르는 것들. 가족이 바라는 대로의 삶과 내가 오랫동안 바랐던 나의 모습. 안전할지도 모르는 절반의 존재와 더 불안해질 수도 있는 완전한 존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10년 동안 최선을 다해 절반의 존재로 살아왔으니 1년 정도는 절반 너머의 삶을 위해 달려가도 좋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으로 남은 생을 사는 게 그렇게 어렵고 큰일 날 일인지, 직접 지내보고 나서 결정하고 싶었다.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찾아온 기회를 있는 힘껏 누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9,000여 km 떨어진 미지의 섬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모습을 실험해볼 수 있었다. 일주일 뒤의 상황도 예측하기 힘들 만큼 변화와 이동의 연속이었지만, 일과 여행을 병행하며 할 수 있는 만큼 기록을 이어나갔다. 뉴질랜드의 풍경 속에서 진행된 <사적인 파라다이스> 프로젝트를 통해 만여 개의 평온을 수집할 수 있었다. 오클랜드 마라카우 지역에 있는 깊은 숲에서 10일간의 비파사나 명상 코스를 경험하는 것으로 1년 간의 인생 실험도 마무리를 지었다. 매일 12시간씩 명상이 이어지는 혹독한 수련이었지만 내면의 평온을 직접 생산해내는 중요한 태도를 배웠다. 서른을 앞두고 속에 있던 묵직한 바윗덩어리가 부수어지기 시작할 때쯤 10일간의 명상 코스와 그 이후의 삶을 기록한 동명의 첫 책 <사적인 파라다이스>를 썼다. 책을 완성한 공간에서 이렇게 전시를 열 수 있어 대단히 감사하다.

부산에 돌아와 새로운 일상을 구축한 지 2년이 되어간다. 뉴질랜드에서 고군분투하며 지냈던 시간 동안 인생에서 어떤 것들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지 무의식중에 정리가 된 모양이다. 사실 1년 치 여행 짐을 챙길 때부터 이미 삶에서 군더더기를 빼는 연습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 같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추구하며 평온을 수집하는 기록자. 분명하게 느끼는 행복 앞에서 솔직해지고 그 감정을 신뢰하는 삶. 내게 찾아오는 우연과 기회를 충실히 기록하며 살아가는 삶. 앞으로도 계속 기록으로 깊어지는 삶이었으면 한다.

 

 


 

위의 글은 사진전을 준비하며 전시 안내서에 수록한 짧은 에세이 두 편입니다. 주중에는 출근을 해야했기에 제가 없을 때도 이곳을 찾는 분들이 사진 이면에 들어 있는 이 프로젝트의 의미를 알 수 있도록 마련한 장치였습니다. 2018년 2월 이후로 3년만의 전시입니다. 그때는 거의 일주일 만에(!) 후다닥 준비를 했던터라 그 다음 사진전은 한 달 정도면 넉넉하게 준비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018년 전시는 액자 없이 작은 사이즈 인화 사진으로만 가득 채웠는데 이번에는 A3 이상 사이즈의 액자로 준비하고 싶었습니다. 사진에 힘도 생겼고, 자금도 여유로워졌고, 제대로 해보고 싶은 욕심도 생겼으니까요.

브루커피의 특색인 '어두운 공간' 조건을 그대로 활용하기 위해 카페의 전체적인 색감과 어울릴 12점의 사진들을 선별했습니다. 사진전 준비는 매트를 넣을 것인지 말 것인지, 보호 아크릴을 씌울 것인지 감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개방할 것인지, 사이즈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등 좀 더 책임감 있는 선택의 연속입니다. 못질을 할 수 없는 환경 조건 속에서 액자를 거는 방법에 대해서도 연구가 필요했습니다. 사진전에서 함께 판매할 포스터북도 아이패드 화면에서의 색상과 달라서 샘플을 보며 색상 조절을 다시 해야했습니다. 퇴근하고 나면 영업이 종료된 브루커피로 가서 사진전을 준비했습니다.

생각과 판단할 시간까지 고려하면 전시는 준비 기간으로 두 달 정도는 있어야 일상을 헤치지 않는 선에서(!)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을 듯합니다. 단기간동안 신경을 바짝 쓰며 힘들게 준비했지만 정말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잘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 저와 시간이 맞았던 분들은 #공유된낙원 이라는 해시태그를 사용해 기록을 남겼습니다. 전시가 열리는 동안 거의 모든 주말을 이용해 오랜 친구들, 지인들, 손님들을 맞았습니다. 함께 나눈 대화, 인연이 이어진 이야기 등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공유한 시간을 기록해보았습니다.

 

 

사진전에 온 손님들을 기록하다 - 1
사진전에 온 손님들을 기록하다 - 2

 

 

이번 전시는 추상적인 섬인 ‘사적인 파라다이스’가 공간과 물성을 얻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많은 분들과 그동안 수집했던 평온을 나눌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직접 뵙지 못한 분들도 ‘잘 쉬고 갔다’는 메시지를 보내주시고 응원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전시 덕분에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제안 받아서 가을까지 꽉 채워 바빠질 예정입니다. 좋아하는 것들은 자꾸 실행하고 바깥으로 선보이고 그것에 대해 끊임 없이 이야기하면 그 부분이 필요한 누군가에 의해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지속됩니다. 새롭게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무척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낙원이 되어준 브루커피도 감사합니다.

 

 

 

PRIVATE PARADISE POSTERBOOK(2021) 사적인 파라다이스 전시 사진 포스터북 : 사적인 파라다이스

[사적인 파라다이스] 평온을 수집하는 기록자 채린제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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