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노동에서 평온을 찾는 '인생 편집(Life-Editing)'

2022. 2. 24. 23:26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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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1일 저녁, 올해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마음을 내려놓았습니다. 중요한 일들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거든요. 커다란 일 몇 개를 앞두고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날들이 찾아왔습니다. 사실 이 작업들은 모두 설 연휴 때 하려고 다짐했던 것이었지만(1월 29일의 기록) 연휴 다음 날인 2월 3일의 일기를 보면 저는 '눈이 몹시 피로한 채로 잠이 들어 꿈에서도 할 일에 쫓기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 후 20일의 추가 시간을 쪼개어 중간에 5편의 노래 번역 작업도 완성하며 결국 1-2월의 주요 일정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내일은 미리 챙겨둔 연차를 쓰는 날이네요! 이번에는 연말정산 환급금도 함께 들어온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넉넉한 2월입니다.

분명 작년 가을에 「내년에는 안식년을 갖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시간을 완전히 비우겠다는 뜻이었지요. 몸까지 좋지 않았던 당시에는 정말로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달부터 밀려났던 건강이 다시 돌아왔고 회사 일과 작업은 여전히 계속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짧은 시간에 '자아 안정감'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변화가 쌓여 마음에 평온이 찾아온 걸까요. 일과 노동 속에서 사적인 파라다이스를 획득한 경로를 되짚어보았습니다.

 

 

tranquil workplace
거제에서 누렸던 나의 작업실 ⓒ2022. 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삶의 안정감을 판단하는 두 가지 지표


쉽게 불안해지는 성격을 가진 나에게 '안정'이 찾아오는 것은 축복과 같습니다. 이번에 느낀 안정감의 원인을 생각해보았을 때 '건강의 회복에 대한 확신'이 첫 번째, '몰입에 대한 분별이 생긴 것'이 두 번째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가 온몸을 부딪히며 찾아낸 두 가지 지표는 앞으로의 인생에서도 계속 적용될 것 같습니다.

건강이 뒷받침되었을 때 효율이 생기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기에 논외로 둡시다. 작년부터 일련의 작업들을 통해 스스로에 대해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몰입의 방식을 적용하면 된다는 것. 그동안 단순한 몰입의 유무를 시험하는 작업은 충분히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척박한 외국 생활과 다양한 일을 경험하면서 예기치 못한 상황이나 즉흥성을 살려야 할 때, 힘이 없거나 컨디션이 따라오지 않을 때 순간적으로 몰입해 어떻게 해서든 일을 완수해보는 경험치를 쌓았습니다. 하지만 몰입이 시간과 분야를 막론하고 너무 잦을 때 그것이 건강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게임에서도 스킬을 계속 쓰면 MP가 주르륵 닳아 없어지고, 심지어 정말 센 필살기는 MP와 HP를 함께 써야 하듯이 말입니다. 게임 세계가 아닌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쓸 수 있는 마법은 오로지 '몰입'뿐입니다. 안타깝게도 자연 상태의 인간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몰입에 있어서 선택과 집중이 없다면 마법 같은 몰입이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무작정 '타인'을 위한 몰입은 지양하는 것. 이것이 몰입에 대해 최근에 갱신된 제 생각입니다. 이십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내 삶에 일어난 전반적인 일들─일과 연애 등─을 살펴보면 몰입의 방향이 내 자신이 되지 않았을 때 비교적 불. 행. 하. 게 흘러가는 일이 많았습니다. 행복하지 않았던 시간들도 나에게는 질 좋은 자료가 되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편은 아니지만, 지금의 안정감과 비교하자면 슬프고 불안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일찍 내가 나에게 몰입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세상에 대해 훨씬 덜 두려워하며 저를 단단히 믿고 행동할 수 있었을 텐데요.

몰입은 무게과 같습니다. 집중의 무게가 내 자신으로 옮겨오면 실제로 몸의 자세도 바르게 펴지고, 보이지 않는 축이 정수리부터 심장, 꼬리뼈까지 관통하는 기분이 듭니다. 유일하게 나에 대한 집중을 자발적으로 벗어나야하는 순간이 있다면, 밥벌이 노동과 아주 어린아이를 온 마음을 다해 보호하고 따뜻하게 길러내야 할 때가 전부일 것 같습니다. 밥벌이 노동은 내가 시간을 타자에게 양도하고 월급을 대가로 지불받기로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출근해있는 동안은 나의 업무를 우선순위에 두고 몰입을 분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양육할 때에도 부모의 무조건적인 보호와 사랑이 필요한 동안에는 아이에게 완전히 몰입해 키워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외에는 중간중간 상대방에 몰입해 시간을 나눌 때 빼고는 내가 가진 특별한 몰입 능력은 주로 나의 세계를 개발하는 데 쓰는 게 옳은 방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빠져나가는 시간과 노력을 틀어막자

 

삶에 '편집'이 절실했습니다. 올해부터는 시간을 파는 노동에 대해서 선택적으로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원치 않는 노동에 대해서는 좋아하는 분야라고 할지라도 거절을 선언하기로 합니다. 이건 기회가 생기면 거절할 겨를도 없이 불나방처럼 달려들고 보는 나를 위한 지침이기도 합니다. 물론 저를 위해서 쓰는 시간이 앞으로 어떠한 금전적 보상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장으로는 회사일과 번역일 외에 '비노동'을 선언하는 것이기에 추가적인 수입원을 제한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부정적인 기운이 지배적일 때는 억지로 추가적인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긍정적인 기운으로 전환해 일을 진행하거나, 그럴 정신조차 없다면 '일시중지'를 선언하고 몸과 마음에 필요한 일을 해주는 것도 괜찮아보입니다.

혹시나 일이 진행이 되지 않아 당장 수입이 줄어들거나 없는 상황이 온다고 하면 담담하게 그 상황을 받아들입니다. 쓰지 않아도 될 지출을 줄이는 것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그래서 저는 비용이 늘어나거나 수입이 그만큼 더 들어오지 않을 때 무언가를 빼는 법칙을 적용합니다. 최근 아이클라우드 용량 2TB를 확보하기 위해 애플 뮤직 구독을 중단했습니다. 애플 뮤직의 대안으로는 유튜브와 사운드 클라우드가 있었지만 사진으로 인한 부족한 용량 해결이 훨씬 긴급했기 때문에 이러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밖에 '없어도 되는 것', '안해도 되는 것'을 찾아서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대부분은 없어도, 안해도 살아가는 데 별 지장이 없는 것 같습니다.

청년재직자 내일 채움 공제(30만 원)뿐만 아니라 이번 달부터 추가적으로 청년희망적금(50만 원) 넣어서 당분간은 생활이 더욱 빠듯해졌습니다. 이왕 묶인 돈이 많아진 김에 잠재적으로 나의 세계를 더욱 견고히 하는 일에 나머지 몰입을 쓰기로 했습니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것들은 글쓰기와 독서, 운동, 산책, 공부, 사람들과 영감을 나누는 일로 채워질 것입니다. 몰입의 방향이 명확하게 설정되니 이동하는 시간에도 음악을 듣기보다 필요한 정보를 공부하게 됩니다. 억지로 시키는 공부가 아닌, 내가 만들 세계에 대한 재료를 찾기 위해 자발적으로 뛰어드는 공부입니다. 모든 집중이 일체감 있게 내 삶에 착착 작용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특별한 편집 능력입니다. 우리는 삶에 진정으로 밀착하는 이런 순간들로부터 분명한 평온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에 대한 밀착감은 부정적이었던 에너지를 다시 긍정적인 것으로 변화시킵니다. 이렇게 인생 편집은 다른 무엇이 아닌 '나'를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삶의 무게와 방향을 잃은 기분이 든다면 가까운 미래에 내가 이루었으면 하는 세계를 떠올려봅니다. 무엇에 몰입해야 할지 냉정하게 판단해보고 아무것도 해낼 에너지가 없다면 그중 가장 작고 하찮은 것부터 하나씩만 이뤄나가 보시기 바랍니다. 이건 남이 해주지 못합니다. 우리 각자가 자발적으로 삶의 편집자가 되어 필요 없는 부분을 자르고, 가장 절실한 부분을 덧댈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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