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케이션'으로 만끽하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겨울

2023. 9. 17. 00:15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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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를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 

    2022년 12월 30일 금요일, 4년 5개월 동안 몸을 담았던 직장의 마지막 근무날. 그리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에게 두 달의 기회가 주어졌다. 이 기간 동안 이탈리아에서 결혼할 언니를 만나고, 독일에 있는 연인을 만나러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몇 년 동안 오랜 휴식은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 기억에 남는 가장 진한 휴식이라면 2022년 3월, 코로나로 인해 격리된 채 지냈던 일주일이 전부. 회사일을 하면서도 의뢰받은 글을 쓰는 일과 번역일, 사진일 등의 작업들을 병행하느라 몸과 마음이 바빴고, 다니던 회사도 일주일 이상의 순수한 휴가를 가지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나의 특기는 <잘 참고, 나 좋을 대로 해석하는 것!> 무엇보다 나는 슬프지 않아야 하는 사람이라, 허락된 여건 안에서 행복과 만족을 얻는 데에 집중했다. 내게 오는 작은 기회와 만남을 소중히 여기자 조금씩 삶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처럼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천천히. 그렇게 작가이자 가사 번역가로 3년 동안 프리랜서 일을 하고 있던 '음악 산업' 분야로 직무 환경을 바꾸었다. 중학교 때 가정통신문에 엄마가 '딸이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 걱정된다'라고 적어 보냈던 아이가 결국은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되었다. 새로운 일이 시작되는 3월까지 나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두 달 동안 업무(Work)와 휴가(Vacation)가 섞인 시간을 보냈다.

 

일과 휴식, 우정과 사랑이 버무려진 워케이션


    2023년 1월 1일, 비행기 안에서 떠오르는 새해를 맞이했다. 삶이 참 요물이라고 느껴지는 게, 좋아하는 분야와 점점 깊이 얽힌다. 친구이자 연인이 된 마르코는 내가 사진 촬영을 맡은 공연으로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는 자동차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겸 개발자로 일하고 있지만, 열다섯 살 때부터 디제잉을 하며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가 처음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던 주제도 음악이었다. 서로 영감 받은 음반을 알려주고 이야기하는 데만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 후 자주 산책하고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할수록 서로가 귀한 인연이라는 걸 깨달았다. 타이밍이 자꾸 각본처럼 들어맞고, 있는 모습 그대로 존재해도 불편하지 않았다. 이 자연스러운 신호를 따라 신뢰를 쌓으며 삶의 가능성을 완전히 펼쳐보고 싶었다. 

 

 

로밍도깨비 E-Sim으로 유럽 워케이션 준비 완료!

    해외 유심은 다운로드 받아서 바로 사용할 수 있는 E-Sim으로 선택했다. 휴대폰과 노트북에서 모두 써야 하기 때문에 핫스팟이 가능한 상품으로 알아보다가 아이폰 전용인 '로밍도깨비'로 최종 선택. 아쉬운 것보다는 넉넉한 편이 마음이 편해 '유럽 42개국 / 30일 / 일 2GB 소진 후 384 Kbps 속도로 무제한 사용, 핫스팟' 상품으로 구매했다. (2023년 9월 기준 48,100원) "로깨비eSIM" 앱 안에서 결제를 하고 이메일을 통해 QR코드를 받아 안내대로 진행하면 된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 국내에서 미리 등록을 해두고 출발했다. 30일이 끝난 후에는 충전하는 방식으로 계속 사용했다.

 

이탈리아 밀라노 나빌리(Navigli) - 창가의 테이블

     밀라노에 머무는 일주일은 그동안 쉼 없이 달려온 나에게 주는 휴가였다. 회사에도 1월 첫째 주만큼은 일거리를 보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그리하여 2022년과 2023년을 공백으로 잇게 된 7일. 4년 5개월 만에 두 달이라는 텅 빈 시간을 마주하니 머릿속도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달콤하고 영감 가득한 휴가를 꿈꿨지만, 현실은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3년 동안 퇴근 뒤 프리랜서 일을 하며 밤낮으로 (보통은 주말에도) 집중하던 습관을 갑자기 멈추자 시차 적응을 겪으며 호르몬 붕괴와 짧은 수면, 인후통, 복통이 찾아왔다. 나는 왜 휴가마저도 이 모양일까! 침대에 누워 절망하기도 했지만 몸이 겪는 변화의 시간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혼을 쏙 빼놓는 피로가 지속되다가 나흘째 되는 날 처음으로 정상적인 수면을 되찾았다. 

 

이탈리아 나빌리 풍경
밀라노 나빌리 주택가 풍경 / (c)2023. Chaelinjane All Right Reserved

 

    우리는 운하를 품은 동네 나빌리(Navigli)에 숙소를 예약했다. 거실과 방 하나, 화장실, 부엌이 있는 아파트에서 지냈다. 나지막한 아파트였지만 꼭대기 층이라 나름 운치를 즐길 수 있었다. 성당이 가까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종을 울릴 때면 나는 창문을 열고 종소리가 멈출 때까지 고요한 순간을 음미했다. 굴뚝에 피어오르는 연기, 겹겹이 포개어진 건물, 드문드문 불이 켜진 창문들을 따라 도시를 눈으로 훑었다. 프리랜서 일은 일주일간 멈춘 상태이지만, 창가 근처에 글을 쓰는 테이블을 마련했다. 이른 아침 혹은 늦은 밤, 오로지 나를 위한 기록을 이어간 책상이었다. 

 

이탈리아 나빌리 숙소 테이블
나빌리 숙소에 마련한 작업 책상 / (c)2023. Chaelinjane All Right Reserved

 

    "이 도시는 끊임없이 묻는다. 내가 앞으로 어떤 색을 품은 사람이 되고 싶은지. 패션의 중심지에서 엉뚱하게도 '가장 자연스러운' 내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가져온 몇 안 되는 옷의 조합으로 충분히 나를 드러내고 있다. 삼일째 되는 날까지 컨디션은 엉망이었고 밤마다 깊은 피곤에 시달렸지만, 낭만이 가득한 이곳에서 현기증 나는 아름다움에 빠져 있다." (2023년 1월 5일 일기 중)

 

이탈리아 파르마 - 거실과 도서관

    밀라노에서 일주일을 보낸 뒤, 기차를 타고 찬미언니와 파올로가 있는 파르마로 향했다.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삶을 이어가는 언니는 원래 이곳에서 살던 사람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무엇이든, 누구와 함께하든, 오후 4시의 햇살처럼 누그러뜨려버리는 게 언니의 기운이니까. 파르마의 시간은 한결 느리게 흘러갔다. 오전 10시가 넘어 커피와 함께 느긋하게 시작되는 두 사람의 일상에 섞여 에너지를 마저 회복할 수 있었다. 나는 늘 오전 7시 30분쯤에 잠이 깼지만, 두 사람이 일어나기 전까지 글을 쓰거나 일을 하며 집중적인 시간을 보냈다.

    나의 침대는 거실 소파였고, 바로 옆에 놓인 테이블에서 작업을 이어갔다. 외부로 숙소 비용이 빠지는 대신, 함께 먹을 식재료를 사고 와인을 한 병이라도 더 사서 다 같이 즐기는 게 훨씬 낫다고 모두가 동의했다. 언니와 파올로는 내가 만드는 커피를 무척 사랑했고, 오전에 미리 집 청소를 해두면 두 사람은 기쁨과 감동의 환호성을 질렀다. '매일 아침 나에게 카푸치노 한 잔을 만들어 달라!'는 게 찬미의 결혼 조건 중 하나였기 때문에 파올로는 최근 드롱기 마그니피카 S를 구입했다. 카페에 갈 시간과 비용을 대폭 줄일 수 있어 파올로 본인에게도 올해 들어 최고의 투자였다고. 파르마에 머무는 동안 카페 마끼아또와 카푸치노는 내가 담당했다. 묵직한 우유 스팀을 연습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매일 아침이 되면 커피를 만들고 마실 생각에 신이 났다. 파올로는 자신의 작업방에 들어가 오전 재택근무를 시작하고, 언니와 나는 커피와 함께 빵이나 쿠키, 과일을 곁들여 작은 담소를 나눴다. 점심시간 전까지 언니는 수영을 가거나 책을 읽고, 나는 거실 테이블에 앉아 작업을 이어가는 게 평일의 루틴이었다. 나는 다 같이 식사를 하는 점심 전까지 할 일을 최대한 끝내 두고, 오후에는 밖으로 산책 겸 촬영을 나갔다.

    거실 왼편에는 테라스로 나가는 통유리 미닫이문이 있어 일을 하다가 막힐 땐 밖에서 바람을 쐬기에 좋았다. 이 집에는 언니의 고양이 뿌니도 함께 살고 있다. 부산에서부터 거의 8년째 봐온 우리지만, 뿌니는 낯가림이 워낙 심해 간헐적으로 만났던 나를 여전히 경계하는 눈치였다. 뿌니는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내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기도 하다가 어떤 밤에는 내 다리 옆 빈 공간에 몸을 둥그렇게 말고 함께 잠을 자기도 했다.

    "글공부를 마음껏 하는 아침. 카푸치노를 만들어 마시고 언니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은 뒤 계속 책을 읽고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이 순간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기적과 일상, 이 두 개념의 차이는 뭘까. 차이가 있기는 한 걸까." (2023년 1월 17일 일기 중)

 

아침식사고양이 뿌니
내가 만든 커피로 시작하는 아침, 그리고 멀리서 나를 지켜보는 고양이 뿌니 / (c)2023. Chaelinjane All Right Reserved

 

    모든 게 좋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바로 인터넷! 파올로가 공유기를 주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가 머무는 2주 동안 인터넷은 e-SIM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한국에서 작업 2개가 급하게 들어와 새벽에 일어나 작업을 진행했다. 현지 시간 새벽 5시, 한국은 오후 3시. 정해진 시간이 없는 게 프리랜서의 묘미이면서 위험한 지점이기도 하다. 스스로 시간을 조절해야 하니까. 가사 번역을 위해 한국에서 보내준 음원 파일을 다운로드해야 하는데, 현지 인터넷 속도 자체가 느릴 때가 많아 중간에 다운로드가 계속 멈췄다. 한국 인터넷으로 30초도 안 걸릴 일이 여기서는 30분 넘게 걸렸다. 마감일에 긴급한 작업이 추가가 되어 1분 1초가 귀한 날이었다. 이날은 유난히 집 인터넷이 느려서 시내로 허겁지겁 뛰쳐나가야 했다.

 

이탈리아 파르마 관다 도서관이탈리아 파르마 관다 도서관
파르마 관다 도서관 / (c)2023. 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오후 2시 25분, 적당한 곳을 찾다가 발견한 파르마 관다 도서관(Biblioteca Guanda). 대학생들 사이에서 맥북을 펼치고 글을 쓰고 있으니 꼭 중요한 과제를 마무리 중인 국제학생이 된 것 같았다. 번역 초벌작업을 모두 끝내고 나니 짧은 시간 애를 썼던 피로감이 우르르 몰려왔다. 파르마에서 가장 정신없었던 날이었다.

 

독일 레겐스부르크 - WG 거실과 방

    1월 20일. 오전 8시 7분 기차를 타고 밀라노 센트랄레역에서 말펜사 공항으로 이동한 후 뮌헨 공항을 거쳐 레겐스부르크역에 도착했다. 오후 4시쯤 역으로 마중 나온 마르코를 만났다. 여기가 바로 너의 도시구나. 짐을 지키느라 잠을 푹 자지 못했지만 레겐스부르크에서 느껴지는 묵직하고 포근한 기운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독일은 집을 공유하는 WG(Wohngemeinschaft, 본게마인샤프트) 형태로 생활비를 절약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마르코도 친한 친구와 함께 다른 플랫메이트 몇 명을 더해서 공동주거 형태로 지내고 있었다. 방 5개와 게스트룸 1개, 거실 2개, 화장실 2개, 큰 정원이 있는 집이었다. 마르코는 일주일 중 하루 이틀만 사무실로 출근하고, 나머지 날은 재택근무로 일했다. 그는 본업 말고도 친구들과 운영 중인 회사가 있어서 어떤 날은 밤 10시가 넘어서까지 일을 하는 날도 있었다. 개인 시간이 필요했던 나도 작업 시간을 포함해 글 쓰는 시간과 책 읽을 시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어 큰 무리가 없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리듬이 맞는 인연은 정말 귀하다. 

 

공용 테이블눈이 쌓인 정원
거실과 정원 / (c)2023. 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이곳에서 나는 부엌 근처의 거실 테이블과 꼭대기에 있는 개인 방을 오가며 일했다. 가끔은 정원으로 나가 바깥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며 온전한 적막을 즐겼다. 뉴질랜드에서 지낸 시간을 제외하면 평생을 아파트나 오피스텔에서 살았고, 눈이 귀한 따뜻한 남쪽 도시에 있었다. 이렇게 흙이 가까이 있는 주거 형태에서 온전한 겨울 풍경을 피부로 느끼며 살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나무 어딘가의 새 둥지에서 청아한 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새로운 삶이 열리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오후 4시에 번역을 하다가 잠이 미친 듯이 쏟아져서 한 시간 동안 낮잠을 즐겼다. 감기 증세가 정말 많이 호전되고 있는 것 같다. 호르몬 변화로 인한 피로까지 함께 겹쳐서 온몸이 나른해졌다가 남은 와인에 배, 바게트와 루꼴라 크림치즈 소스를 간단히 곁들여 먹으며 기운을 충전했다. 독일에 온 지 일주일째 되는 날. 말로 다 하지 못할 편안함을 느낀다." (2023년 1월 27일 일기 중)

    짧은 낮 시간, 우중충한 날씨. 현지 사람들도 다른 나라로 탈출한다는 유럽, 특히 독일의 겨울. 하지만 나에게는 북적이는 관광보다 사색과 글쓰기가 동반되는 한적한 쉼이 필요했기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워케이션 장소였다. 첫 독일을 겨울로 경험해서 좋다. 앞으로 수많은 축제와 즐거운 시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탈리아의 밀라노와 파르마, 독일의 레겐스부르크로 이어졌던 나의 작업실은 3월부터 서울 북한산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서울 생활을 시작하며 누리고 있는 다양한 기록 공간들도 천천히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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