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 나를 태우지 말고 시간을 태우자

2023. 7. 21. 21:30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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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로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밤. 할 일을 끝내고 침대에 누웠는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늘 포근하게 나를 감싸던 이불이 그날 밤에는 무거운 철판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올 것이 왔구나.' 서늘해지는 호흡과 두근거리는 심장. 좁고 긴 불안의 터널로 들어가기 직전에 나에게 찾아오는 이상신호였다.

 

 

1단계 - 정면돌파!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우리는 불안과 걱정을 마주한다. 익숙하지 않은 업무에 긴장과 피로가 쌓이면 평소보다 더 쉽게 에너지가 바닥나고 부정적인 상태로 흘러가기 쉽다. 불안한 감정에 대한 나의 첫 선택은 정면돌파였다. 슬프고 처절한 기분으로 반쪽자리 주말을 보내느니 차라리 원인을 없애는 방향으로 시간을 쓰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불안을 들여다보니 그 속에 '잘 알지 못해서'라는 단순한 이유가 숨어 있었다. 생전 처음 하는 업무에 하루라도 빨리 익숙해지면 그만큼 부정적인 생각이 줄어들 거라 생각했다. '나 퇴근했는데? 주말인데? 내가 왜 회사일에 신경 써야 해?!' 이렇게 손해 본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 불안과 짜증이 엉겨 붙어 마음이 큰 화를 입게 된다.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오는 게 느껴지자 잠시 눈을 감고 깊은 호흡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일이 익숙하지 않을수록 의식적으로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스트레스가 쌓인다. 회사일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앞당기면 미래의 내가 받을 스트레스도 그만큼 감소하여 지금보다 행복한 상태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는 데 힘 쓰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이다.

자신에게 합당한 결론을 내리고 나서 책상 앞에 앉아 나의 언어로 찬찬히 새로운 업무 내용을 정리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숙지하고 나니 조금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잠들 수 있었다. 

이번만큼 생산적인 주말을 보낸 적이 있을까. 불안감을 상쇄하는 건 정말 일에 미쳐버리는 게 유일무이한 방법인 것 같다. 쓰고 싶었던 글을 써냈고, 자정이 넘어서까지 회사 업무 정리 ppt를 만들고 내일 일정을 미리 정리해 두었다. 신기하게 미리 끝마쳐두니 불안할 이유가 상당히 사라졌다. 심지어 통제감이 들면서 자신감과 재미도 따라붙는 것 같다. (3월 26일 일기)

 

2단계 - 세상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가 없지...

    거의 독립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온종일 생산적인 시간으로 채우고 있다. 출퇴근길에는 외국어 학습, 출근해서는 새로운 업무에 완전 몰입, 집안일을 할 때는 명사 강연이나 독일어 학습 틀어두기, 여분의 시간은 글쓰기와 독서. 가만히 있으면 누군가 잡으러 오기라도 할 것처럼. 이렇게 빡빡하게 사는 이유는 '서울에서 누릴 수 있는 시간도 유한하다'는 걸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자금 마련하기(=최소한의 소비)
- 현재 회사 일에 최선을 다하기
- 건강한 루틴 형성하기
- 글쓰기 훈련 멈추지 않기
- 책은 시간이 날 때마다 읽기
- 타인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을 하기 위한 기반 다지기
- 독일 생활을 위한 언어 익히기
- 독일에서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고민하기

    그야말로 절제와 훈련의 연속인 나날이다. 이미 가득 찬 하루 일정이지만, 회사 일이라는 게 가끔씩 폭발적인 업무를 감당해야 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정면돌파! 를 외친 나였지만, 계속되는 정면돌파에 에너지가 거의 바닥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작업이 들어올 때도 시간을 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허투루 시간과 돈을 쓰지 않기 위해 온갖 애를 썼다. 이런 노력에도 결국 두려운 손님이 깊고 강력하게 찾아오고 말았지만.

 

 

3단계 - 번아웃의 밑바닥에서 헤매기(일기 부분 모음)


4월 5일. 왼쪽 손목이 완전히 맛이 갔고 오른 손목도 시큰거린다. 쉴 새 없이 자판을 두드리는 일을 하는 나는 무엇을 하면 건강한 손목을 얻게 될까. <존 치버의 일기>를 읽다가 다시 글을 쓰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혔고, 자판을 두드리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 손목이 원망스럽다.

4월 19일. 압박감일까, 부담일까. 악몽을 꾸고 일어났다. 피로가 그대로 쌓인 수면이었다. 

4월 22일. 드디어 찾아왔네. 깊은 무기력. 이건 세상과는 별개의 문제라 일상은 아랑곳 않고 무섭도록 냉정하게 찾아온다. 기운을 겨우 내서 나를 위한 요리를 대접하면, 나는 또 기운을 바득바득 긁어서 설거지와 뒷정리를 해야 한다. 이런 귀찮음보다 돈 쓰는 게 더 싫은 걸 보니 결국은 감당해야 할 일상이지만.

4월 30일. 아침에 눈을 뜨고 산을 올라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앞으로 겪을 다양한 일들을 정신력으로 통제하고 싶었다. 6~7km. 끊임없이 오르막길을 오르는 무자비한 산행이었지만 마치고 돌아오니 성취감이 대단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독일어를 공부했고 A2 챕터 2를 끝냈다. 그런데 계속 찾아오는 공허함과 두려움은 어떡하지.

5월 1일. 손목 통증이 극심해져서 아침에 빨래를 돌려두고 병원에 다녀왔다. Micro Wave Diathermy, ICT, Laser Therapy, Paraffin Bath, S&S, ESWT까지 1시간 동안 물리치료를 받았다. 관절은 멀쩡한데 힘줄에 염증이 생긴 모양이다. 비급여항목 12만 원. 금액이 부담스럽지만 실비보험을 믿어보기로 하고 우선 통증 경감에 힘을 쏟기로 한다. 따뜻하고, 편안하고, 걱정이 싹 사라지는 기분. 솔직히 물리치료실이 웬만한 마사지샵보다 더 행복하다. 정오가 다 되어 병원을 나왔고, 첫 끼를 버거킹에서 채우고 집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어쩐지 아무것도 해낼 기운이 없어 침대에 누워 온찜질을 마저 하다가 잠이 들었다.

5월 23일. 쫓기는 듯한 꿈을 꾸고 늦잠을 잔 줄 알고 화들짝 놀라 잠이 깨었다. 두려움이 느껴진다. 왜, 또, 뭐가 무서운 거지?

6월 1일. 아무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 같은 불안이 올라오면 템포를 낮추고 심장박동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는다. 긴장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느슨히, 살살 시간을 써도 괜찮다. 1분 1초를 강박적으로 부여잡으려고 하면 빨리 망가진다.

6월 6일. 번아웃이 맞는 것 같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면서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모든 긍정적인 기운을 불러내느라 진이 빠졌다.

6월 18일. 다시 불안이 올라오고 번아웃 증상이 나타나서 산으로 향했다. 정신을 딴 곳으로 빼내고 몸에 다른 기운을 불러오기 위해서. 1시간 30분, 5km를 걸었는데 고도 변화는 300~400m 정도. 체감 시간이 3시간처럼 느껴졌다. 샤워를 하고 빨래를 두 번이나 하고 돈 쓰지 않고 점심부터 저녁까지 잘 챙겨 먹었다. 끊임없이 할 일을 이어가지만 공허하고 슬픈 기분이 든다. 도대체 왜? 왜? 왜? 이 심리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6월 27일. 부정적인 기운을 없애기 위해 어제 잠들기 전, 오늘 일어나기 전 침대 위에서 할 수 있는 스트레칭을 했다. 어제도 새벽에 잠이 깨었고, 눈을 감은 채 선잠으로 2~3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불안감이 숙면을 방해한다. 망상인지 실제인지 알 수 없어 몇 번 생각을 거듭하다가 자신을 겨우 달래고 잠이 든다. 그런 불안감이 아침에는 배앓이로 찾아온다. 일을 하지 않으면 이런 불안도 멈추게 될까? 

7월 1일. 오랜만에 해가 비구름 없이 제 모습을 드러냈고 찌는 열기와 허기에 어지러움이 찾아왔다. 이 느낌, 지난주 토요일 전시 준비를 하고 책을 조립하느라 바삐 지낸 그날과 같은 증상이었다. 피로가 겹겹이 쌓여 붕 떠 있는 기분. 하지만 잠시라도 멈추면 영원히 멈출 것 같은 기분. 이런 게 강박증이려나.

7월 4일. 최악의 인쇄 사고가 지나가고, 다시 저녁이 왔다. 오늘은 비가 많이 내린다. 걱정이 있는 상태인지도 모르겠다고 하자 마르코가 'You seem to be in a depression. Why don't you see a psychologist?'라고 걱정한다. 눈물이 나서 세수를 하고 돌아왔다. 삶을 일으킬 새로운 철학이 필요하다. 서울 생활에서 내가 지켜온 원칙에 자신이 없어졌다. 틀린 건 아닌데, 무언가 다른 것이 숨어 있고 내가 그걸 보지 못하는 기분이랄까. 그게 뭔지 알아낼 때까지 이 상태가 풀리지 않을 것 같다.


 

4단계 - 마음이 아닌 '시간'을 태우며 나아가기

   번아웃의 늪에 빠져 있던 100일 동안 꾸준히 자신을 관찰했다. 조금 괜찮아졌다가 다시 가라앉기를 반복했지만, 그럴 때마다 기록해 두면 나중에 힌트가 보일 거란 희망으로. 그렇게 모은 데이터에 의하면, 나는 아래와 같은 방법으로 조금씩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느리게 걷는 산책길에 도서관에 들려 그날 끌린 책 대출, 등산을 겸한 빠른 산책(땀을 쫙 뺄 것), 설거지, 집청소, 현재 상태 기록, 명상, 샤워, 어질러진 물건 정리, 화분에 분무기 뿌리기, 장소 바꾸기(보통 카페), 책 읽기, 넷플릭스에서 끌리는 영화나 드라마 보기, 눈 감아버리기(일찍 자기), 마르코에게 현재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기, 현재 상황에 감사하기

 

     누구나 다 아는 싱거운 방법인가? 다들 똑같이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처럼, 어쩌면 인간에게는 대단한 방법이란 게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해결 방법을 다 알고도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무기력에 압도당할 때도 있다. 가만히 시간을 죽이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할 일이 앞에 있는데 너무 하기 싫을 때 제가 찾은 방법은 '5분'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이 5분은 단순한 5분이 아니다. '5년 뒤는 모르겠고, 솔직히 5일 후의 계획까지도 바라지 않아. 5시간도 아니고 그냥 딱 5분. 5분만 참고해보자.' 5년의 시간 덩어리에서 나온 아주아주 작은 5분이다. "채린아, 제발 5분만!"이라고 실제로 소리칠 때도 많다. 마침내 첫걸음을 떼고 나면 시작한 힘이 나를 이끌어주고 마무리까지 하게 된다. 운이 좋으면 5분이 채 걸리지 않을 때도 있고.


5월 2일. 작은 휴일이 끝나고 찾아온 화요일. 생각보다 많은 일들을 큰 스트레스 없이 해내서 놀라웠다. 확실히 앰비언트 칠(ambient chill) 플레이리스트가 도움이 된다. 긍정적인 에너지로 이끈다. 어떤 신비로운 힘이 이렇게 유도하는 거지? 별안간 행복을 느꼈다. 몰입이 행복을 가져오는 것인지, 행복한 기분이 몰입으로 향하는 지름길인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이런 반듯하고 건강한 에너지를 실감하는 순간 기록하고 싶었다. 저녁을 맛있게 차려서 먹고, 따뜻하게 샤워를 하고, 어지러운 방을 청소하고, 명상하는 마음으로 좌식 책상에 앉아 잠시 일기를 쓰고 있다.

5월 18일. 37.8km. 친구의 생일파티를 마치고(실은 통증 때문에 중간에 나왔다) 머릿속도 정리할 겸 한강-중랑천-우이천에 이르는 3시간 라이딩으로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새벽 2시 50분. 보상으로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 먹고 집으로 걸어왔다. 기운이 빠지는 와중에 성취감과 쾌감이 느껴졌다. 근육통도 그리 심하지 않았고, 잠도 빠르게 들 수 있었다.

6월 9일. 창고방, 부엌, 내 방을 대대적으로 정리했다. 마르코도 독일에서 대청소를 함께했다. 근육통이 올라올 정도로 샅샅이, 낱낱이 치웠다. 정신이 말끔해지는 기분이다. 새 관점을 얻자! 오늘 김승호 회장님에게서 캐낸 좋은 문장. "서른 살이 넘어가면 눈치보지 말고 원하는 대로 살아요. 내가 눈치를 봐야할 사람들은 오직 15살의 나와 65살의 나. 기를 빼앗는 사람 곁에서 있지 않아도 괜찮아요."


    몸과 마음이 정지하는 번아웃.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 5분만 그 일에 집중해 보고, 번아웃을 조금이라도 느낀 저녁에는 꼭 명상과 이른 잠으로 지친 몸을 달래주는 건 어떨까. 우리는 마음 대신 시간을 태우며 순간에 머무르거나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나의 솔직한 번아웃 관찰일지가 조금은 위로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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