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확신할 것인가

2024. 1. 31. 23:55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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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을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 나에게 이번 1월은 '2025년 마이너스 12월'의 개념에 더 가깝다. 삶의 방향이 명확하게 정해졌으므로 회사일 이외의 거의 모든 시간이 새로운 미래로 향해 있다. 사랑과 삶의 가치를 한 군데로 모을 수 있어 폭발적인 집중을 만든다. 좁고 한정적인 세계가 아니라, 사막과 바다처럼 막막할 정도로 드넓게 펼쳐진 인생을 마주할 때 나에게 이런 반응이 일어나는 것 같다. 마침 그 세계를 함께 바라봐주는 이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내 인생은 책과 글에 바짝 붙어 있다. 그 말은 책상 앞에서 비정상적으로 긴 시간을 보내는 것에 익숙하다는 뜻이다. 책과 글은 보통 타인과 함께하기보다는 혼자만의 영역이라, 이런 특성 덕분에 홀로 있는 시간을 외로움이나 고통 없이 기꺼이 즐길 수 있다. 나의 독일인 연인은 자연과 음악에 몰두하기를 좋아하며 프로그래밍과 개발자의 삶에도 최선을 다한다. 오랜 세월 동안 친구들과 켜켜이 쌓은 문화가 있으며, 가끔은 일과 파티, 음악 프로듀싱, 사이클링 등 바쁜 일정으로 숨 쉴 틈도 없이 지나갈 때도 있다. 다른 나라에서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연인이라, 우리는 힘들고 지친 날에 아득한 고독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거리 연애가 기이하게도 무탈하게 흘러가고 있는 까닭을 생각해보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확신.' 이를 위해서 작년부터 나에게 물었던 질문이 있다. '이 연애에서 최악의 상황이 벌어져도 나는 무너지지 않고 최대한 감당해낼 수 있는가?' 상상도 하기 싫은 시나리오들을 떠올려보면 그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내가 해야 하거나 준비할 수 있는 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연애에서 최악의 상황은 이별이나 상대에게 다른 사랑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를 떠올리니 '혼자 남겨지더라도 가장 기쁘고 강력하게 삶을 끌어안을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벌이도 돈벌이지만, 사랑을 하는 것만큼이나 황홀하고 큰 만족을 주는 일이어야만 끝까지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책과 출판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고, 장거리 연애의 특혜(?!)로 나에게 허락된 1년 남짓한 시간을 오롯이 새로운 언어를 공부하고 꿈꾸던 일로 다가가는 것에 힘쓰고 있다. 이렇게 하면 자기에게 집중하는 에너지가 고스란히 사랑을 연장시키는 연료가 된다. 게다가 자기 세계를 가꾸는 에너지는 실로 대단해서 상대에게 조금 더 오랫동안 내가 가장 좋은 친구이자 파트너로 남을 확률이 높아진다. 이렇게 '자립도'를 높이는 쪽이 개인과 관계 모두를 위해 좋다. 최악을 생각하니 매 순간 더 나은 결정을 내리게 된다.

최근에 연인이 실수를 하나 했다. 사소한 해프닝이었지만, 우리 관계에서 '100%의 정직함'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그는 그런 일이 벌어진 까닭에 최선을 다해 이야기해주었다. 연인은 혹시나 내가 장거리 연애를 포기하고 그를 떠날까 봐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실시간으로 드러난 나의 태도였다. Vipassana 명상에서 배운 대로, 부정적인 자극이 내 안에 독으로 남지 않도록 샅샅이 분해했다. 그리고 예전부터 생각해 둔 여러 가지 최악의 시나리오들이 너무 극악 난이도였는지, 연인의 실수가 그만큼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렇게까지 침착해도 되나? 할 정도로 어른스럽고 현명하게 연인에게 조언과 경고를 건넸다. 연인은 이번 일로 더더욱 나와 평생을 함께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힌 것처럼 보였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깊이가 비슷하고, 정말 많은 대화로 서로의 가치관을 솔직하게 나누면 그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신뢰감이 생긴다. 그 믿음은 '이 사람은 흐트러짐 없이 나만 바라봐줄 거야'가 아니라 '우리는 같이 만드는 우리만의 세계를 그리며 기대하고 있다'는 확신이다. 그 의지는 억지로 노력한다고 생성되지 않는다. 각자의 삶에서 펑펑 솟아오르는 에너지가 우연히, 기적적으로 맞닿는 일이다. 쉽지 않은 환경에서 함께하고 싶은 의지가 강렬한 게 얼마나 소중하고 확률이 낮은 일인지 안다. 이 연인을 만나기 전까지 고단한 연애를 겪으며 세포 하나하나 시리게 깨달은 일이다.

마음껏 공부하고 사랑할 세계가 출렁인다. 나의 확신 위로 실제적인 행동이 쌓인다. 과정과 여정 자체가 빛나는 인생이라면, 그 어떤 결과라도 향기로울 거라고 믿는다. 남은 1년 동안 서울에서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을 엮어나가며 독일어를 최대한 축적해야겠다. 빠르게 찾아오는 밤 시간이 아쉽지만, 피곤과 자부심이 섞인 잠도 꽤나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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