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고립'으로부터 시작하는 독립 생활

2023. 7. 15. 17:00Life

반응형

독립, 온전한 인간이 되는 연습

    서울 생활 4개월 차. 새로운 습관을 들이기 충분한 시간이다. 그동안 낯선 분야의 일을 익혔고, 막막했던 첫 장거리 연애는 안정 궤도에 올랐다. 매일 회사일, 외국어 공부, 제2의 삶을 위한 공부, 독서, 글쓰기, 집안일에 전념하며 지낸다. 요리와 자잘한 집안일은 독립생활의 묘미라고 할 수 있다. 내 몸과 터전을 직접 돌보는 일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 본능을 일깨워주니까. 아기새가 야생에서 먹이를 찾고 둥지를 만드는 것처럼 인간은 독립을 통해 생물로서의 본성을 회복한다. 

    첫 서울생활을 시작한 3월, 이곳의 생활 물가를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독립을 시작하자마자 지출을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생존 전략을 세웠다. '수입의 50% 저축'이 목표다. 가까운 미래에 커다란 모험을 시작해야하기에 비교적 숨 쉴 만할 때(?!) 씀씀이를 줄여보면 좋을 것 같았다. 최소한의 자원으로 최대한의 결과를! 그러다 보니 동네를 산책하거나 집 혹은 도서관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다. 어린아이가 놀이터에서 무엇이든 찾아내 놀이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창의성을 발휘해 주어진 환경에서 흥미롭고 유익한 생활을 이어간다.

 

가장 많이 애용하는 공간들. 부엌 식탁과 도서관. / (c)2023. 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30대 때 맛보는 독립은 20대 풋내기 시절과 다른 식감을 가졌다. 어렸을 때의 독립이 의문투성이였다면, 지금은 그동안 쌓인 수많은 질문을 통해 바라는 바가 조금 더 명확해졌다. 쉽게 돈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나갈 때, 재택근무로 시간을 유연하게 다룰 때, 매일 할 일들을 해나갈 때 내 삶을 견인하는 기분이 든다. 부산에서 부모님과 같이 지낼 때는 '어떻게든 혼자인 공간을 마련하고 싶어서' 혼자 단골 카페나 바를 즐겨 찾았는데, 이제는 취향으로 채워진 내 공간이 생기니 다른 소비 공간을 찾을 필요가 상당히 줄었다.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원하는 시간 언제든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다. 매일 밤 서울에서 허락된 이 시간을 감지하며 주변 사람들, 공간을 채우는 물건과 식물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기꺼이 혼자 있음을 택하는 일

    독립. 특히 홀로 사는 것은 자유와 책임의 확장판이다. 어느 방향으로든 인생을 그려나갈 수 있다. 가끔은 텅 빈 공중에서 언제 닿을지 모르는 육지로 끊임없이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언제 잠이 들고 언제 일어날지, 어떤 식재료로 어떤 음식을 먹을지, 긴급한 업무를 어떻게 처리할지, 무슨 책을 읽을지, 집안일을 할 때 강연이나 음악, 넷플릭스 중 무엇을 틀어놓을지, 독일어 공부를 어떻게 할지, 독일에서의 삶을 어떻게 이어나갈지, 그 시간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빠르게 낙하하는 상황에서 '선택과 가능성'이라는 낙하산을 최선을 다해 펼치는 기분이다. 하지만 내가 가진 건 애를 써도 겨우 1cm씩만 펼쳐지는 낙하산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이쪽에서는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일단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는 수밖에 없다.

    이 낙하산을 이루는 기본 재료는 '일기'와 '책'이다. 횡설수설 아무렇게나 뱉어낸 문장들이지만, 나에게서 나온 단어가 얼기설기 모여 캐노피로 향하는 줄이 된다. 기록은 끊임없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굳이 의문형으로 끝나는 질문이 아니더라도 일기를 쓰다보면 자연스레 그 물음에 대답하게 된다. 일기와 책을 통해 다양한 행동들을 결정하고, 이 과정들이 캐노피의 면을 이룬다. 글을 쓰며 조정줄을 움직이고, 책을 통해 이미 자기만의 비행을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를 청해 듣기도 한다. 무한한 책임감의 크기만큼 불안에 압도될 때도 있지만, 그 감정을 자신의 힘으로 매만지며 스스로 비행을 해 나간다.

    금요일 저녁,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좋은 식재료로 자신에게 맛있는 저녁을 대접한. 적적한 느낌이 들면 사람들로 북적이고 시끌벅적한 공간이 그리울 때도 있다. 혼자 있고 싶지 않다는 욕구가 스르르 올라오면 '현재 나의 에너지'와 '어차피 해야 할 일'을 떠올려보고 무얼 하는 편이 더 큰 만족감을 주는지 결정한다. 나는 이번에 식사 뒷정리를 하고, 음식물 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를 개운하게 비우는 것을 택했다. 찬물로 갈증을 달래고, 아침에 단추가 떨어져 입지 못한 재킷을 가지고 부엌 식탁에 앉았다. 독일에 있는 연인이 재택 근무하는 시간과 겹치면 대부분 영상 통화를 켜둔다. 그는 동료와 회의를 이어갈 동안, 나는 저녁을 먹고 재킷에 단추를 달았다. 그리고 책을 읽다가 밀린 일기를 쓰며 하루를 마감했다. 

    집과 일상을 돌보는 것이 인생을 관리하는 일의 시작점이란 걸 독립하고 나서 여실히 깨닫고 있다. 홀로 삶을 돌보는 감각과 힘을 길러두면 여러모로 이득이다. 장거리 연애 중인 사람들에게는 심리적인 안정과 지속적인 관계, 전속력으로 자기 발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동시에 선물한다. 안정감은 무조건 상대의 곁에 바짝 붙어 앉는다고 생겨난다기 보다, '자기 안정감'으로부터 비롯되는 것 같다. 자신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스스로를 잘 돌봐나가는 행위에서 자기에게 신뢰가 쌓이고 안정이 생긴다. 나중에 연인과 가족을 이루고 싶어지면 지금 형성한 건강한 기반을 토대로 자연스럽게 타인과 삶을 합쳐볼 수 있다. 계속 혼자 살고 싶은 사람들은 좋은 습관이 단단히 자리 잡힌 훌륭한 독립생활을 그저 계속해나가면 된다. 스스로 '고립'될 수 있는 여유는 어떤 삶의 형태든 내 모습 그대로 세상에 안정적으로 존재하게 한다.  

    한 인간이 독립된 개체로 제대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삶을 다뤄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비로소 완전한 혼자가 되면 숨어 있던 자아가 제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기꺼이 고립을 선택할 수 있는 환경 안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알아간다. 자연스럽고 온전한 인간이 되고 싶은 마음이 나를 지속적인 사랑으로, 내가 신뢰하고 싶은 자신의 모습으로 이끌어 간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