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잘 배열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 / 크리스 마르케(Chris Marker) 감독의 영화

2022. 3. 13. 10:00Art

반응형

우리는 글이나 회화, 데생을 통해 세상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진'에 비해 전자의 결과물은 실제와 덜 연관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글이나 그림은 백지에서 작가의 노력에 의해 글자와 물감으로 채워집니다. 여기에는 작가의 생각이나 의식이 완전하게 투영될 수밖에 없습니다. 수전 손택의 말을 빌리자면 회화나 산문을 통한 묘사가 '세밀히 선택된 해석'일 때, 사진은 '세밀히 선택된 투명성'이라고 할 수 있지요. 물론 사진의 조작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사진이 현실 세계를 반영하는 정도가 글이나 그림보다 훨씬 더 정확하다는 특성 덕분에 사진은 증거 자료로 활용되며 본인 확인을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사진이 충실히 이 세상만을 반영하기만 할까요? 똑같은 사건을 두고 100명이 사진을 찍는다면 서로 다른 100장의 사진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구도나 주제적인 측면으로는 비슷하게는 보여도 완전히 똑같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진은 현실을 꽤 투명하게 반영하지만 찍는 사람의 취향과 의식에서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사진에는 필연적으로 '수집' 행위가 전제됩니다. 셔터를 누르는 즉시 그 매체가 가지고 있는 저장 공간으로 이미지가 쌓입니다. 사진을 통해 세상의 면면을 작은 프레임 속에 모을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장면뿐만 아니라 그에 얽힌 추상적인 경험이나 지식까지 수집하는 것으로 확장됩니다. 사진은 이렇게 사진을 찍는 사람의 취향과 의식, 관심거리들을 조금씩 모으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여행 가서 찍은 사진이나 각종 인증샷 등이 있겠네요.

ⓒ2022. 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그렇게 작가가 노골적인 의도로 선택한 일련의 사진들은 전시 형태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그 사진들은 사진책에 실리거나, 액자 안에 들어가 벽에 걸리거나, 선반 위에 놓이거나, 빛으로 비추어 영사되거나, 아니면 웹상에 전자파일로 전시될 수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사진은 '책'으로 엮는 방식이 가장 고전적이며 효율적이었습니다. 낱장으로 현상된 사진을 그저 종이에 붙이거나 끼워도 되고, 아예 페이지에 인쇄해 보다 완성도 있는 책으로 출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책으로 사진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꼭 페이지 순서를 따르지는 않으며 사진을 보는 데에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라서 작가의 메시지를 완벽하게 전할 수는 없습니다.



치밀하게 배열된 사진으로 완성된 영화

지금으로부터 56여 년 전, 사진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영상'을 떠올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진 슬라이드를 이용해 영화적인 방식으로 스틸 사진을 보여준 프랑스 감독이지요. 작가이자 사진가, 영화제작자로 활동한 크리스 마르케(Chris Marker, 1921 ~ 2012)가 그 주인공입니다. 그의 1966년 작품 <내게 만일 네 마리의 낙타가 있다면(Si J'Avais Quatre Dromadaires)>은 어느 아마추어 사진작가(감독 자신)가 1955년부터 1965년 사이에 자신이 26개국에서 촬영한 사진들을 두 친구와 함께 보며 토론을 나누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800여 장의 사진들은 크리스 마르케가 프랑스 관광 가이드 책 작업을 위해 촬영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진과 의식, 그리고 기억에 관한 대화들은 화면 밖에서 보이스오버 형식으로 영화의 전체적인 전개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가 방문한 나라 중에는 그 시절 남한과 북한의 모습도 담겨 있어 이 영화가 친숙하고도 낯선 느낌이 듭니다. 영상 속 흑백사진들은 49분의 러닝타임 동안 적절한 음향과 함께 확대, 시선 이동 등을 통해 우리가 조금 더 쉽게 작가의 의도대로 사진을 감상할 수 있도록 안내합니다.

If I Had Four Dromedaries(Si J'Avais Quatre Dromadaires), 1966


유튜브에서 찾은 영화 전편입니다. 오래되어 영상 자료가 없을 줄 알았는데 감사하게도 Semeando Fotos라는 채널에서 영상을 제공해주었습니다. 자막은 브라질 포르투갈어로 되어 있는데 자동 번역 기능을 통해 영어나 한국어로 볼 수 있습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번역 어투라 어색할 수도 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작가와 함께 앉아 사진에 대한 에세이를 직접 듣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진에 대한 사유가 필요할 때 꺼내어보면 좋은 다큐멘터리 필름입니다. 기억에 남는 문장들을 아래에 옮기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Since these mysteries are beyond me,
let's pretend we're organizing them.

이 수수께끼들은 내 존재 너머에 있으니
그것들을 정리하는 척이라도 해봅시다.


The photo is the hunt.
It's the instinct of hunting
without the desire to kill.
It's the hunt of angles...
You track, you aim, you fire and
--- click!
Instead of a dead man, you make him eternal.

사진은 사냥입니다.
죽이고자 하는 마음 없이 사냥하려는 본능이지요.
사진은 화각의 추적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대상을) 쫓고,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깁니다.
--- 찰칵!
그를 죽이는 대신, 그를 영원한 존재로 만드는 거죠.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