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의 웰링턴 산책 (2) ─ 판도로 빵집과 뉴질랜드 첫 가톨릭 미사

2018. 8. 5. 16:36Travel

반응형

2018년 8월 5일 일요일


부둣가를 걷다가 성당으로 향하는 빅토리아 스트리트로 발길을 돌린 건 허기가 느껴질 즈음이었습니다. 뉴질랜드 포트레이트 갤러리(New Zealand Portrait Gallery)를 방문하고 싶었지만 오전 10시 30분에나 문을 열어서 포기해야 했거든요. 스파크 와이파이존을 벗어나자 스포티파이 앱에서 듣고 있던 음악이 뚝 끊겼습니다. 오랜 세월 귀에서 음악을 거의 떼지 않고 살았지만 환경이 바뀌어 저도 이제는 덤덤하게 이어폰을 귀에서 뺍니다.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했던가요.

모험을 결심하고 나서는 짐을 쌀 때부터 삶의 부피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했고, 더 나아가 길 위의 생활자가 되고자 한다면 지금보다 살림살이를 더 줄여야 합니다. 물건뿐만 아니라 '습관'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샤워할 때의 습관, 요리할 때의 습관, 옷을 입는 습관 등등 제게 결부된 수많은 습관들은 '비용'에 의해 운영됩니다. 돈을 비롯해서 시간 자원, 물 자원, 전기 자원 등등이 소모되지요. 익숙한 사회를 떠나고 나서야 좋으면 좋을 대로 키워온 저의 방대한 라이프 스케일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고 가치와 연관되어 꼭 지키고 싶은 것들에 비용을 우선적으로 몰아주고 있습니다. 영화 <소공녀>에서 극 중 주인공 미소가 이리저리 오른 물가에 집을 포기하고 위스키와 담배를 선택한 것과 비슷한 다짐이랄까요. 물가가 비싼 이곳 뉴질랜드에서 음악 스트리밍에 추가적인 비용을 할애하는 건 자연스레 한-참 뒷 순위가 되었습니다.

 

7달러의 행복

지난 생일 때, 라글란에서 최고의 커피맛으로 꼽혔던 카페 '라글란 로스트 Raglan Roast'를 들리지 못하고 온 게 무척 아쉬웠습니다. 그런데 빅토리아 스트리트를 걷다 보니 건너편에 라글란 로스트 웰링턴 지점이 있더라고요. 라글란 본점의 멋스러운 간판은 어디로 가고 여기에는 살짝 촌스러운 간판이 걸려 있었지만 이참에 커피를 맛볼까 싶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침인데 함께 먹을거리가 별로 없는 것 같아 고민이 되긴 했습니다. 항구에서 나오는 길에 발길은 라글란 로스트로 향하고 있었지만, 혹시나 더 괜찮은 카페가 나올까 주위를 둘러보며 걷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거의 성당에 다 왔을 즈음, 길 건너편에 손님이 가득한 베이커리가 보였습니다. 상호명은 Pandoro Panetteria, 판도로 빵집. 구글 맵스로 찾아보니 별점 4.2에 훌륭한 리뷰들이 많았습니다. 이른 시간부터 북적이는 로컬들이 모든 것을 증명해주는 듯했지요. 아침 식사 하기에는 딱인걸요. 커피냐, 빵이냐. 둘 사이를 고민하다가 라글란 로스트는 또 다음으로 미루게 되었습니다.

 

뉴질랜드 웰링턴 판도로 빵집
Pandoro Panetteria, Wellington, New Zealand / ⓒ chaelinjane, 2018

 

거의 꽉 찬 것 같은데 사람들이 자꾸 들어오네요. 혼자 온 사람은 나밖에 없었고 보통은 친구나 가족, 연인들끼리였습니다. 여러 명 앉기 곤란해 보이는 테이블이 보여 그 자리를 선택했습니다. 나는 미사 시간 전까지 최대한 오래 머물 생각이었습니다. 초코빵과 롱 블랙 한 잔을 주문했다. 「아침에 카페에서 맛있는 커피와 빵을 먹으며 책에 푹 빠지는 것」, 보름 동안 잊고 살았던 작은 행복이었네요.

저는 데보라 로렌슨의 소설 『The Sea Garden』을 가지고 갔습니다. 정원 디자이너인 엘리가 프랑스 남단에 위치한 예르의 뽀흑끄홀르 섬의 어느 저택에 고용되어 거대한 낡은 정원을 복원하며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표지에서 풍기는 분위기로 봐서 고요하고 차분한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초반이 살짝 넘어가자 미스터리 장르로 돌변해 눈에서 책을 뗄 수가 없었어요. 한 시간 정도 머무르다가 나왔습니다. 시계를 보니 미사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네요. 좀 더 거리를 걸을까 하다가 성당에 일찍 가 있는 것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세인트 마리 오브 디 앤젤스(St. Mary of the Angels) 성당

빅토리아 스트리트를 살짝 벗어나 약간의 오르막길을 오리면 세인트 마리 오브 디 앤젤스 성당이 환한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1843년에 첫 성당이 지어진 자리가 지금까지도 신성한 역사를 더하고 있어요. 미사 시간은 오전 11시 말고도 다양합니다. (SMOA 미사시간 확인하기) 하지만 제가 굳이 11시 메인 미사를 고집했던 이유는, 이 미사 시간에만 성가대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뉴질랜드 웰링턴 성당 - 세인트 마리 오브 디 앤젤스
St. Mary of the Angels Catholic Church, Wellington, New Zealand / ⓒ chaelinjane, 2018

 

입구에 비치된 성수를 찍어 성호경을 그었습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촉이었어요. 이마에 얹어진 건 작은 수분에 불과하지만 마음은 벌써 고요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미사가 시작되기까지 40여 분이 남은 시간, 성전 내부는 절반쯤 어두웠고 나처럼 일찍 온 할머니 한 분과 젊은 남성이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성당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어요. 왼쪽 앞에 마련된 공간으로 가서 기도를 하고 다이어리를 꺼내 글을 적었습니다.

저는 들뜨고 소란스러운 성가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10대 때도 학생 미사가 아닌 교중 미사에 가기를 선호했습니다. 어렸을 때 성가대가 부르는 라틴어 성가곡을 들었는데, 아름다워서 눈물이 멈추지 않고 계속 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슬픔과 억울함, 감사와 영광스러움이 뒤섞여 하나의 큰 감정이 된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스테인드 글라스에 닿아 아름다운 색채로 쏟아져 내리던 햇살과 성전 내부를 공명하던 목소리들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날 이후로, 오만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학생 미사 때 흘러나오는 성가들은 별로 아름답게 들리지 않았고 시종일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가볍게 느껴지고 말았습니다. 

성인이 된 지금도 종종 미사 시간 때 눈물이 날 때가 있습니다. 미사 시간만큼은 마음 속의 응어리들을 꺼내게 됩니다. 아니, 내가 자처해서 꺼내 놓기보다는 이 공간이 저를 압도해서 숨겨 놓고 싶은 응어리에도 자연스레 스며듭니다. 성당이라는 공간이 주는 분위기와 성가대 음악이 저에게는 어쩌면 기도 그 자체보다 더 큰 치유가 되어주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에 앉았고, 저도 중앙 가까이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곧 미사가 시작됨을 알리는 오르간 연주가 울려 퍼집니다. 마오리 신부님이 성전으로 천천히 들어오셨습니다. 나는 완전히 몰입한 1시간을 보냈습니다. 제가 경험한 미사와 다르게, 사제가 신자들의 시야를 정면에서 가로막지 않고 왼쪽으로 비껴 앉아 있었습니다. 신자들이 '사제를 통해' 신께 기도드리지 않고 '직접'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하는 의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기적인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오리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며 다이어리에 적은 내용은 이렇습니다. '미움과 혐오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사람이 되자. 타인과 사회, 그리고 세상을 작지만 좀 더 이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가족을 비롯해 한국 사회에서 누렸던 모든 친밀한 관계가 저의 든든한 갑옷이었습니다. 보금자리를 떠난 여행자가 타국에서 냉대를 받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인데, 태어나서 처음 겪는 감정에 내 속에도 사람에 대한 미움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흥분을 가라 앉히고 상대에 대한 존중을 담아 의사를 전달하는 것. 제가 이 모험 중에 배워야 할 가장 큰 덕목일지도요. 

 

뉴질랜드 웰링턴 성당 - 세인트 마리 오브 디 앤젤스
St. Mary of the Angels Catholic Church, Wellington, New Zealand / ⓒ chaelinjane, 2018

 

성체 예식이 끝나고 흘러나온 성가에 마음이 쏙 빼앗겨서 중간 부분부터 옆에 놔둔 카메라로 녹음을 했습니다. 덕분에 집에 와서도 종종 생각이 날 때마다 꺼내 듣고 있다. 제목이 알고 싶은데 유튜브로 'Choral Mass'를 검색하고 한 시간씩 되는 동영상들을 살펴봐도 찾을 수가 없네요. 세계 여러 나라의 성당을 다니다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우연히 이 성가를 다시 들을 수 있기를 고대하는 수밖에요. 잔잔한 산책과 맛있는 빵과 커피, 그리고 성당에서의 미사. 정신없던 웰링턴에서의 마지막은 이토록 고요하고 평온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