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서 풀려나온 실오라기

2022. 7. 7. 21:35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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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이성적인 사고가 감정을 이겨내는 시간이 찾아왔다. 현실보다는 이상을, 논리보다는 감정을, 치밀한 계획보다는 우연의 낭만을 사랑하는 성질이 만연한 INFP에게 이러한 변화는 유전자를 바꾸는 일이나 다름없다. 본성의 반대편에 서 보겠다는 의지는 1994년 영화 <러브 어페어>의 여주인공 '테리'를 알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침착함과 평정심을 잃지 않는 그녀의 태도가 그때 당시 나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참을 수 없는 동경이 싹트기 시작한 이후로는 다양한 고난 속에서 테리의 태도를 떠올리게 되었다. 예민함과 불안을 타고났기에 평생 명상과 운동으로 수양이 필요하지만, 10여 년 전의 내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은 그래도 어린 채린보다는 테리 쪽으로 많이 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그마한 발전이지만 열심히 살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이성이 흔들릴 수 있는 강력한 사건 중에 하나는 바로 '사랑'. 오래 전 한 번의 긴 연애 이후로 좀처럼 깊게 찾아오지 않는 감정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친구 단계를 건너뛰고 곧바로 연인이 되는 것 자체가 내게는 힘든 일이다. 나는 오래된 관계에서 신뢰와 애정을 느낀다.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내면서 굳이 묻지 않아도 자연스레 알게 되는 과정을 좋아한다. 낯선 사람과 연애를 앞서 시작해버리면 사랑의 감정이 뿌리를 내리기가 쉽지 않다. 충분히 거리를 두고 지인 혹은 친구로 지내다가 이 사람이다 싶을 때 깊은 애정을 서로에게 쏟아주는 연애. 참으로 이상적이고 유난스러운 성향이지만 어쩔 수 없다. 당분간은 연애가 어려울 것 같으니 능력을 쌓고 필요한 것들을 수양하며 지내야 할 것 같다. 당연히, 그것도 나쁘지 않다.




    "채~린. 나 P랑 결혼해!"

    진행 중이던 연애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날,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언니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송정을 지나 해가 저무는 달맞이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고, 결혼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너무 기뻐 차 안에서 소리를 꽥 질렀다. 얼마나 오랫동안 언니가 혼자였는지 알고 있었기에 지금 침울한 나의 상황과는 별개로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상대는 언니가 20대 유학 시절, 런던에서 만난 이탈리아 남자 P. 얼마 전 두 사람이 함께 내 전시를 찾아줘서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전화하는 내내 그때 목격한 두 사람의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와, 미치겠다. 너무 축하해!
    그럼 나 이탈리아 갈 준비하면 되는 거야?

    언니 결혼 사진은 내가 찍으면 되는 거고,
    간 김에 거기서
    새로운 프로젝트 재료들도 좀 모아볼까."



    "너무 좋지. 그러면 내 결혼식은 무조건
    채린이 스케줄에 맞춰야겠다!
    우리 저번에 이야기했던 그거..."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언니랑 나는 늘 그렇듯 상상을 가득 펼쳤다. 이번에도 역시 얼마든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이렇게 마구 떠오르는 생각들을 검열할 필요도 없이 내뱉을 수 있는 존재는 만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내 모습 그대로, 자연스레 존재할 수 있는 친구. 오랜 시간 마음 깊이 언니와 인연을 이어온 덕분에 나는 바다 한가운데 서서 활짝 웃으며 원 없이 눈물을 쏟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혼자이지만 이런 인연들 덕분에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이 든다.

    시간. 어쩌면 인연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일지도 모른다. 곁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면 서로의 삶을 체감할 수 있으니까. 아주 사적인 영역들은 모를 수 있어도 그 사람의 성향이나 해오고 있던 일, 관심 분야 등을 통해 상대방의 큰 패턴들을 짐작은 해볼 수 있다. 언니는 한국을 떠나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일상을 펼쳐나갈 것이다. 원래 이탈리아에서 살 예정이었던 것처럼 언니는 이 모든 게 무척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녀가 P를 대하는 마음은 어떤 층위에 있는 사랑일까. 8년의 공백을 깨고 두 사람이 다시 서로를 향하게 된 감정은 도대체 무엇일까.

    "누굴 만나도 계속 P 생각이 나더라고.
    그때 알았지. 내 운명은 이 사람을 벗어날 수 없겠구나.
    그런데 P도 그런 생각이 들었대.
    서로가 서로의 마지막 인연이겠구나, 하고."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인연이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채울 수 없는 나의 절반을 오직 그 사람만 채울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늦더라도 결국 인연은 제자리를 찾아간다. 애써 찾은 절반의 인연이 악연이 되지 않기 위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잘 수양하고 통제하며 큰 마음을 가지고 성장하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 진짜 내 인연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멋진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까.


    불안하고 제대로 판단할 수 없을 때, 나는 '미래에서 풀려나온 실오라기'를 떠올린다. 내가 누군가와 삶을 함께 할지 좀처럼 알 수 없을 때도 현재보다는 미래의 시점을 그려본다. 원하는 모습에서 거꾸로 현재까지 내려와보면 고민에 빠지기보다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다. 설령 그 미래의 모습이 그저 망상일 뿐이라도 어쨌든 현재 필요한 행동을 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될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니 여러모로 이로운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무더운 여름밤, 잠시 마음껏 슬퍼했다가 주변의 인연들을 축복하는 마음과 함께 현실로 돌아왔다. 불빛을 태운 파도가 쉴 새 없이 일렁거리는 것을 보고 있으니 냉정을 탑재한 INFP 버전은 오랫동안 바다를 봐 온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밤바람에 섞인 먼 바다의 공기가 거실의 끝에서 끝으로 백마처럼 달려간다. 미래에서 온 실오라기를 만질 수 있다면 이처럼 서늘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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