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수 체크리스트! 전월세집, 구하기 전에 ◦◦◦◦부터 명확히

2023. 4. 15. 09:00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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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업, 취업, 참으로 다양한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향한다. 앞으로 살아갈 동네와 집을 아주 신중하게 선택한다. 며칠, 몇 주, 혹은 몇 달이 걸리기도 한다. 하지만 1시간 만에 집을 구하고 당일날 이사까지 마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저요! 빠른 속도로 나에게 가장 적합한 결정을 내리는 간단한 방법을 시험해 본 날이었다. (물론 그때를 생각하면... 피로감이 무진장 몰려오지만.) 세상 일은 어쩌면 그렇게까지 오랜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빠른 결정 뒤에 후회도 최소화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도대체 무슨 일로 번갯불처럼 집을 구해야 했을까?



    2월 17일 귀국, 2월 27일 이사, 그리고 3월 3일 첫 출근. 꽤 촉박한 일정이었다. 이사 갈 집은 친한 언니가 살던 곳. 새로운 동료들을 미리 만날 겸 언니 집에 놀러 갔다가 봐둔 장소였다. 언니는 결혼을 위해 이탈리아로 몇 달간 떠나 있을 예정이라 내 첫 출근 날짜에 맞춰서 언니가 없는 빈 집으로 이사를 가기로 결정했다.

    나의 우선순위는 회사와 가까운 위치보다는 비용 대비 숨통이 트이는 집. 바깥 음식보다는 요리를 해서 먹을 생각이었고, 카페나 바에서 돈을 쓰는 대신 모든 것들을 최대한 '집'에서 해결하고 싶었다. 일주일 중 2~3일 이상 재택 근무가 가능한 일이라 출퇴근 거리는 후순위로 밀려도 괜찮았다.

    자연이 가까운 동네에서 느껴지는 느긋한 바이브, 매우 저렴한 집값, 언니가 쓰던 가구를 그대로 쓸 수 있다는 이점까지. 발품을 팔지 않아도 되는 시간 절감, 비용 절감이 나에게는 더 중요했다. 귀국하자마자 이사 준비에 돌입해 며칠에 걸쳐 짐을 택배 여섯 상자에 부치고 드디어 떠나는 날. 차로 옮길 수 있는 물건들을 싣고 부모님과 함께 부산에서 서울로 먼 여정을 떠났다.

 

뜻밖의 문전박대

    오후 4시쯤 서울에 도착. 좁은 골목길에 겨우 주차를 했다. 그런데 이삿짐을 옮기려 하자 집주인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철창 밖으로 주인아주머니가 짜증을 쏟아낸다.

    "우리는 계약 못해요. 원래 있던 아가씨 한국 돌아오면 그때 얘기합시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 그야말로 청전벽력. 집주인아저씨는 나이가 너무 많았고 경미한 치매를 앓고 있어 언니와 나눈 대화도, 나와 나눈 통화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벽 여기저기 맞춤법이 죄다 틀린 손글씨 메모들을 보니 한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분들 같았다. 당연히 며칠 전부터 정성들여 보내둔 문자도 전부 무용지물. 언니 계약 기간을 이어받아서 지내기로 이미 이야기가 다 되었는데, 집주인은 마치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팔짝 뛰고 있으니 황당할 따름이었다. 이탈리아에 있는 언니와 전화 연결을 해줘도 집주인은 끝까지 모르겠다고 난리다. 저기요, 며칠 전에 기분 좋게 통화하면서 월요일날 보자고 했잖아요...

 



    몇 번의 머리 아픈 실랑이 끝에 그냥 부동산으로 향했다. 아예 다른 집을 구하는 편이 더 빠를 것 같아서. 부동산에서도 어찌됐든 '주인 마음'이니 어쩌겠냐는 반응이다. 속이 부글부글,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좋은 환경을 찾기로 한다. 그런데 새로 구해야 한다면 굳이 회사와 먼 이 동네에 있을 필요가 있을까? 택배 상자 4개는 이미 저 집에 도착해 있고, 그다음 날에도 택배 상자 2개와 다른 택배들이 줄줄이 더 도착할 예정이었다. 일단은 마음에 드는 다른 집이 있나 먼저 살펴본 후, 동네를 바꾸는 일은 나중에 결정하기로 했다. 멘탈이 바사삭. 정신머리를 단단히 잡고서 다른 후보들을 찾아 나섰다.

 

도전!!! 하루 만에 집 구하기

    부모님께 이런 상황을 제공한 것도 죄송하고, 혹시나 출근 전날까지 집을 못 구하면 어떡하나,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런 말이 있다, 급할수록 돌아갈 것. 시급한 마음에 집을 대충 구하기보다는 이성적인 판단이 필요했다. 상황에 휩쓸리지 않도록<우선 순위>를 다시 한번 상기했다.

 

<내가 바라는 조건>

- 0순위 : 오늘 당장 입주가 가능한 집(출근까지 4일 남았으니!ㅠ 이삿짐 정리 후 하루라도 쉬고 싶다)
- 1순위 : 보증금↑, 월세↓(고정지출비용 최소화)
- 2순위 : 창문이 많아서 볕이 잘 들고 환기가 유리한 공간
- 3순위 : 최소한의 공간 분리가 가능한 공간(투룸이 베스트!)
- 4순위 : 필수 가전제품 옵션(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 5순위 : 엘리베이터
- 6순위 : 가드닝으로 외부 공간 사용 가능

 

    다행히 매물 몇 개가 근방에 있었다. 부동산에서 보여준 첫 번째 집부터 눈을 질끈 감아야 했지만. 당장 입주는 가능하고 작은 냉장고, 오래된 세탁기와 에어컨이 있는 건 그나마 합격. 그렇지만 집주인은 월세를 많이 받고 싶어 했고, 창문이 도로로 나 있어 환기하는 것조차 찝찝했다. 공간 분리가 힘든 통짜 원룸, 계단을 이용해야 하는 3층이었고. 부동산 사장님 말로는 오래된 동네라 엘리베이터 있는 건물은 거의 없다고 한다. 아, 마음에 드는 요소가 이렇게나 없다니!

    1, 2순위라도 꼭 들어맞는 집이었으면 좋겠다고 다시 한번 언급하자 부동산 사장님이 두 번째 집을 보여주었다. 집주인이 미국에 있어 각종 서류 처리가 곤란해 대출 없이 들어오는 세입자를 찾느라 비어있던 집이라고 한다. 2월에 리모델링을 끝내서 거의 새집 같았다. 전세로 나온 집이었지만 집주인이 흔쾌히 최대 보증금 / 낮은 월세로 해주겠다고 한다. 큰 방 4면 중 2면에 창문이 있고 1면은 도로를 바라보지 않는 방향이라 환기하기에도 좋았다. 화장실까지 합쳐서 창문은 7개나 있었다. (와우!) 투룸이라 공간 사용에 가장 이상적이었고. 하지만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이었고 냉장고와 세탁기도 없는 텅텅 빈 집이었다. 가파른 계단으로 택배 상자를 옮길 생각을 하니 앞이 아찔해졌다.

 

 

    세 번째 집은 가드닝까지 넘볼 수 있는 넓은 평수의 옥탑방. 부푼 기대감에 연락을 해봤지만, 다른 호실에 살던 세입자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가 옥탑방이 비었을 때 잽싸게 옮겼다고 한다. 구경도 못한 채 세 번째 집은 포기. 근처 다른 부동산도 알아보려고 했더니 주인이 다른 손님들과 함께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밖은 슬슬 어두워지고 있었다. 곧 날이 저물 것 같았다.

    "나, 두 번째 집으로 선택할게!"
    "정말이야? 확실하나?"
    "응, 최선이야. 그런데 보증금을 당장 어떻게 마련하지?"

    두 번째 집의 보증금은 원래 이사 가려고 했던 곳의 10배. 부산에서 원래 살려고 했던 집 보증금 만큼만 준비해왔기 때문에 자금을 더 마련해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넣어둔 신협 계좌를 급한 대로 해지하면 얼추 급한 돈이 만들어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미 은행 업무 시간이 끝나갔고, 계좌 해지를 위해 다시 부산에 다녀와야 하는 최악의 가능성도 남아있었다. 그때 떠오른 구세주, 작은 이모! 당장 쓸 수 있는 돈을 끌어모아서 예약금을 걸어두고 이모부께서 다음 날 대출을 해서 나머지 보증금을 전해주기로 했다. 아. 기적 같은 일. 결국 길거리를 떠도는 대신 새로 구한 집으로 바로 입주할 수 있었다. 냉장고와 세탁기, 에어컨이 필요하다고 하니 집주인이 이것도 옵션으로 넣어주겠다고 한다. 이렇게나 친절한 집주인을 만난 것도 운이 좋고, 위기 상황에 도와주는 가족들이 있어 눈물 나게 감사한 순간이었다. 평생 잊지 않을게요. ㅠㅠ

    이전 집에 온 택배와 차 안에 실었던 짐들을 4층에 올렸다. 아버지가 거의 10번 넘게 계단을 오르내리셨다.  '그동안 산에 다녀오기를 정말 잘했다'며 웃으시는 여유까지. 부동산 사장님도 팔을 걷어붙이시고 짐을 몇 번이나 옮겨주셨다. 더 애를 쓰면 몸살이 날 것 같아 정리는 다음날 하기로 하고, 근처에서 저녁을 먹은 뒤 일찍 피로를 달랬다. 부모님께 큰 방을 드리고 작은 방에서 이불 더미 위로 몸을 뉘었다. 곤두 선 신경 사이로 스며드는 안도감. 감사하면서 죄송한 마음이 들어 소리 없이 정말 많이 울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잘 살아보겠다고 굳게 다짐했던 밤이었다.

 


접이식 선반 테이블을 놓은 부엌 공간 / (c)2023. 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취향으로 채워가는 공간 / (c)2023. 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이사 당일날 계약이 온데간데 없어져서 집을 새로 구해야 했지만, "우선 순위"가 명확한 덕분에 빠른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지낼수록 점점 더 마음에 들고, 아무리 봐도 제 상황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집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토록 바랐던 식물도 기르고, 좋은 루틴을 형성해 전례 없던 건강한 기분으로 하루하루 열심히 지내고 있다.

    집 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생의 모든 순간에 선택이 필요하다. 우선 순위가 없다면 여러 선택지 가운데서 길을 잃기 쉽다. 시간과 노력, 어쩌면 더 큰 비용이 들지도 모른다. 예상치 못한 위기상황이 터졌을 때, 의식과 무의식은 그동안 명확히 쌓아둔 생각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린다.

    혹시 이사를 앞두고 있는가? 아니면 무언가 결정해야 할 일이나 이미 오랫동안 질질 끌어오던 고민이 있는가? 나에게 필요한 요소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나열한 후 다른 요소들과 하나씩 비교해 가며 순위를 정해 보자. 쓰다 보면 희미했던 생각에 윤곽이 잡히기도 한다.

    나는 처음에 그냥 '창문이 있는 집'으로 썼다가, '환기가 잘 되는 구조로 창문이 나 있는 집', 그리고 더 나아가서 '도로 방향으로 나지 않는 창문이 있고, 환기가 잘 되는 구조를 갖춘 집'으로 디테일한 조건을 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구조를 발견했을 때 그렇지 않은 집보다 훨씬 큰 가치를 매길 수 있었다. 대신 출퇴근 시간과 대중교통 환승 등은 과감하게 감당하기로 마음먹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게 큰 단점이었지만, 다른 요소들의 가치가 훨씬 비중이 높아 이 또한 과감히 포기하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공짜로 매일 운동을 하는 셈 치기로! 조금이라도 더 중요한 것, 덜 중요해도 괜찮은 것. 100점짜리 정답은 아니더라도 <92점짜리 해답>이라면 충분히 훌륭한 선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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