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오클랜드 아트 갤러리 산책 - 고대 유적 기록물부터 현대 미술, 뉴질랜드 페미니즘 제2물결까지

2022. 2. 5. 09:03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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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적인 겨울 장마가 시작됐습니다. 놀라운 건 장마라고 해서 하루 종일 흐린 우울한 날씨가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몇 분간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졌다가, 금방 햇볕이 들었다가, 또 흐려지고 바람이 심하게 불다가,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가 하기 때문에 꽤 재밌고 지루하지 않은 장마입니다. 하도 순식간에 바뀌어서 순번을 제대로 정하지 못한 햇빛과 비가 서로 겹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빛이 야자수 나뭇잎 끝에 달린 빗방울 속으로 파고 들어가 귀고리의 보석처럼 반짝입니다. 제 생애 이렇게 활기찬 장마는 없었습니다. 폭우가 쏟아진 덕분에 자연이 아닌 문화 속에서 모험을 즐기기로 했습니다.

 

 

오클랜드 아트 갤러리(Auckland Art Gallery / Toi O Tamaki)

*2018년 5월 기준

  • Wellesley St E, Auckland 1010
  • 운영 시간: 매일 10am - 5pm (크리스마스에만 휴관)
  • 갤러리 입장료: 뉴질랜드 거주자 성인 무료(거주지 증명* 지참), 회원 무료(유효한 멤버스 카드 지참), 12세 이하 어린이 무료 / 일반 성인 $20, 국제 학생 $17 (ID 지참)
  • 특별전은 12세 이하 어린이만 무료, 뉴질랜드 거주자 성인 $15(거주지 증명 지참), 뉴질랜드 거주자 할인 $12.5(거주지 증명, Community Services Card 소지자, 시니어 ID, 학생 ID) / 일반 성인 $28(갤러리 입장료 포함), 국제 학생 $25(갤러리 입장료 포함, ID 지참)
 
*거주지 증명(Proof of Residency): 뉴질랜드 운전면허증, 은행 카드, 도서관 카드, 우편으로 온 요금 청구서, 은행 잔고증명서 등

 

 

OTHER PEOPLE THINK:

Auckland's Contemporary International Collection


 

Dale Frank Painting
ⓒ 2006 Dale Frank, Auckland Art Gallery / 2000 x 2000mm

 

 

1층에서 칠레 아티스트 알프레도 자(Alfredo Jaar)의 라이트박스 작품 이름을 타이틀로 차용한 국제 현대미술전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미술관에만 오면 없던 용기가 생겨 과감해지곤 하는데, 입구의 라이트 박스 옆에서 약간의 연기를 선보인 사진을 찍고는 관람을 시작했어요. 남미를 포함한 아시아-태평양 지역 예술가들의 작품을 모은 전시였는데, 현대 미술답게 그림, 사진, 비디오, 키네틱 스컬프쳐(움직임이 있는 조각), 설치 작품 등 다양한 장르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진한 바니시 냄새가 후각을 먼저 이끌었고 좋아하는 색감이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이 전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호주 아티스트 데일 프랭크(Dale Frank)의 이 바이오모픽 추상화(biomorphic abstract painting)를 꼽고 싶습니다.

 이 작품은, 제목이 아니라 작가 노트라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지만, 'Lately he had been spending much time in quiet dull thought. So many of his artist friends were happy. And he just could not understand why. He was not happy. Their art was not better than his, their press not better. Maybe, he realised, that it was just him, he was a loser, a chiller, a shit. But how could he turn that into art he thought, and get rich from it. (최근 그는 많은 시간을 조용하고 멍청한 생각을 하는 데 보내고 있었다. 그의 많은 예술가 동료들은 행복했다. 그리고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들의 작품은 그의 작품보다 더 낫지 않았다. 평가도 그랬다. 그는 깨달았다. 아마도 그게 그냥 그 때문이라는 것. 그는 루저, 칠러, 똥덩어리였다. 그렇지만 그는 그것을 어떻게 그가 생각하는 예술로 전환하고 부자가 될 수 있었을까.)'라는 아주 긴 제목을 가졌습니다. 구역질 나는 감정을 받아 마시며 또 다른 자신에게서 고통스럽게 무언가를 파헤치고 있는 예술가의 치열함이 느껴집니다. 걸쭉하고 농밀하게 표현된 감정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고군분투했던 요즘의 모습들이 생각나서 더욱 이 작품을 격렬히 감상했습니다.

 

 

 

 

Patrick Pound Photography
ⓒ 2012 Patrick Pound / Auckland Art Gallery

 

 

뉴질랜드 출신의 사진작가 패트릭 파운드(Patrick Pound)의 작품입니다. 햇살이 강한 대낮에 찍은 스냅사진들 속에 사진가의 그림자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한두 장의 사진이었다면 그저 그림자겠거니 생각하기 쉽겠지만 백 여장이 넘는 사진들이 모이자 그림자의 존재가 가장 지배적입니다. 굳이 타이틀에 '사진가의 그림자'라고 명시하지 않고 은유적인 표현을 써서 관람객들이 그림자를 발견하도록 했더라면 더 재밌었을 텐데요. 사진가의 시간과 발걸음이 느껴지는 작품이라서 실제 크기보다 훨씬 거대하게 다가왔습니다. 개별로 감상해도 마음에 드는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나중에 사진전으로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면 합니다.

 

 

 

 

In the Presence of Absence:

Early Modern Fragments


 

Giovanni Battista Piranesi
ⓒ 1982 Giovanni Battista Piranesi / Auckland Art Gallery

 

 

복도를 걷다가 세심한 펜 흔적이 가득한 작품들이 있는 섹션을 발견했습니다. 작품을 보고 있어도 믿기지 않는, 이성과 예술의 경제를 넘어선 작품들이었습니다. Volterra(1728), Paestum and Herculaneum(1738)에서 발견된 사원, 동상 및 고전 문학의 고대 유적과 유물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의 일환으로, 수집가와 복원가, 판화 제작가가 상상력을 동원해 불완전한 조각들을 영원한 것으로 기록했습니다.

 

 

Giovanni Battista Piranesi
ⓒ 1982 Giovanni Battista Piranesi / Auckland Art Gallery

 

 

 황금비율의 조각상을 그린 게 아닌데도 다 부서지고 조각난 폐허들이 기록물 속에서는 이토록 완벽해 보입니다. 불완전하다고 여겨진 것들이 정성스레 기록되고 나니 완전함-불완전함의 논의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고대 유적의 황폐한 모습 위로, 고난과 혼돈의 시간을 겪어 나가는 인간의 상태가 겹쳐 보입니다. 그 어떤 시련이 찾아온들 그것 때문에 우리가 불완전해지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완전함-불완전함의 차원을 넘어선 존재이니까요.

 

 

 

 

 

 

Collective Women:

Feminist Art Archives from the 1970s to the 1990s


 

전 세계 최초로 여성의 투표권을 법적으로 보장해준 나라가 바로 뉴질랜드입니다. 현재 뉴질랜드 페미니즘은 제2물결을 타고 있습니다. 1970년대 뉴질랜드 페미니즘의 제1물결이 '여성 차별과 불평등 해소'를 외치며 다소 공격적으로 진행되었다면, 제2물결에서는 여성들이 자신들이 가지는 제한된 통제권(임신과 출산, 신체, 자금)에 대해 경제적·정치적·사회적 평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신체를 물건으로 취급하는 시선을 멈추는 것, 여성을 향한 남성의 폭력을 멈추는 것, 여성들이 임신과 출산에 대해 결정권을 가지고 낙태를 허용할 수 있게 하는 것, 남성 여성 모두 동등한 페이와 동등한 직업 기회를 갖게 하자는 것이 제2물결의 주된 목소리라고 합니다.

전시 포스터와 기록물들이 많아서 좋았습니다. 여성 사진작가들의 단체 사진전으로 보이는 'PHOTOGRAPHY as the MEDIUM(매개체로서의 사진)' 포스터가 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Robin White Painting
ⓒ 1978 Robin White / 671 x 385 mm

 

 

전시 공간이 끝나갈 때 즈음 로빈 화이트(Robin White)의 'Mere and Siulolovao, Otago Peninsula' 작품을 발견했습니다. 제목에 나타난 오타고 반도는 뉴질랜드 남섬의 더니든에 위치한 곳입니다. 여성을 영웅화하거나 폄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드러낸 이 그림은 70년대 후반의 페미니즘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림 속 여인이 '여성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그냥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세요.' 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네요.

 

 

 

 

 

 

From Pillars to Posts:

Project Another Country


 

Project Another Country
ⓒ 2018 Alfredo and Isabel Aquilizan / Project Another Country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옵니다. 들어가 보니 온통 종이 상자로 만든 다양한 형태의 집들이 가득합니다. 필리핀에서 태어나 마닐라와 호주 브리즈번을 오가며 활동하는 알프레도와 이자벨 부부의 프로젝트였습니다. 사회가 무엇으로 형성되는지, 가족이 무엇으로 구성되는지, 어떻게 집이 인간의 필요와 관계에 의해 조립되는지를 직접 탐구해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열중하고 있는 성인 참여자들도 많았어요.

 

 

 

Earth is our home

 

서핑을 좋아하는 소년은 지구 자체를 우리들의 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Project Another Country를 한국의 미술관에서도 만날 수 있다면 우리나라 아이들은 과연 어떤 집을 만들까요. 어른들이 만들어낸 천편일률의 아파트 프레임을 해체하고 본인과 가족, 사회를 생각하며 만들어낼 집은 어떨지 궁금해집니다. 나라별 전시가 끝나면 아이들이 만든 집을 통해서 나올 분석도 기대됩니다.

 


 

어느 나라든지 미술관에 가보면 그곳에서 일어나는 핵심적인 이슈들을 바라보는 여러 시각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경험은 우리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전시가 바뀔 때마다 미술관을 찾고 싶은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오클랜드 아트 갤러리를 경험하고 오니 이 나라를 대하는 마음이 또 새로워지는 걸 느낍니다. (2018년 5월 24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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