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절 가능한 불행에 대하여

2018. 8. 16. 15:34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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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16일 목요일

토요일에 차를 팔고, 어제 저녁에 새로운 차를 사고, 주말에 의뢰받은 사진 촬영을 하고, 월요일과 화요일은 사진 작업을 하고 글을 쓰는 데 보냈습니다. 한 달 중 컨디션이 가장 좋지 않은 시기도 함께 견뎠네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한 주의 중간 지점도 지나 있습니다. 조금 더 괜찮은 차를 사기 위해 4개월 동안 모험을 함께 했던 1999년식 혼다 오디세이를 팔기로 했어요. 그동안 시답잖은 이메일 피싱 시도가 네 번이나 있었고, 90년대 차량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과도하게 값을 깎기를 요청하는 사람들에게서만 연락이 왔습니다. 거의 두 달 만에 이 차와 영혼이 딱 맞는 사람들이 나타났어요. 카일과 세이미, 콜로라도에서 온 20대 초반의 아메리칸 커플이었답니다. 그들은 요구하는 가격과 차 상태에 무척 만족했어요. 집이든 차든 제 주인이 있기 마련인가 봅니다.

카일과 세이미
©2018. 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사실 그들에게는 이 차보다 1년 더 오래된 혼다 오디세이가 있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 주차장에 세워두고 트래킹을 다녀온 사이 누군가 차를 통째로 훔쳐갔다고 합니다. 통째로요. 차 안에 있는 여행 짐까지 싹 다요! 트래킹 갈 때의 옷차림과 배낭,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지갑만이 그들이 가진 전부였습니다. 경찰에서도 손을 더 쓸 수 없는 상태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제가 정말 놀랐던 건, 카일과 세이미가 그 일에 대해서 마치 오래전 일을 회상하듯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를 꺼내는 태도였습니다. 어찌 그리 긍정적일 수가 있어,라고 물어보니 그냥 그래야 하니까! 하며 와하하 웃음을 쏟아내더군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은?' ─ 지난겨울, 책을 읽다가 몇 가지 물음들이 나와서 일기에 적어 놓은 것이 있어요. 문득 생각나는 까닭에 카일과 세이미를 만난 이후 다시 펼쳐 보았습니다. 제가 그때 떠오르는 대로 써 놓은 답변을 요약하자면 「소중한 사람이나 물건을 잃는 것」이었어요. 추가적인 질문이 이어졌어요. 그 상황이 제게 미칠 영구적인 영향력은 1부터 10 중에 6 정도로 예상하고 있었고,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50%로 보았어요. 책은 또 이렇게 묻더군요. '손실을 복구하거나 회복하기 위해 밟을 수 있는 단계는?', '위의 시나리오에서 일시적 결과나 이익, 혹은 영구적 결과가 이익은?'

그렇게 질문과 답변을 써놓고 보니 제가 두려워했던 일들은 그렇게까지 속수무책의 재앙은 아니었어요. 완벽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의 '마음/행동 지침'이 있으니까요. 게다가 최악의 상황에 대해 깊이 생각하다 보니 일상에서부터 저절로, 미리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최악을 생각하는 건 위축되거나 행동에 제약을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선물해줍니다. 그것만 조심하면 되거든요. 미래의 'Best'가 아니라 미래의 'Worst'에 초점을 맞추면 지금 당장의 행동이 선명해집니다. 좋은 건 조금 좋든, 아주 좋든, 좋은 게 좋은 거지만 나쁜 건 크기가 작을수록 좋잖아요.

 

누군가의 오래된 책
Piha Cafe, Auckland, New Zealand / ⓒ chaelinjane, 2018

 

4월 말, 뉴질랜드 북섬 서쪽의 피하 비치에 갔습니다. 안개가 잔뜩 끼고 폭우가 퍼붓는 겨울 날씨였어요. 몸을 녹이고 싶어 작은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주문을 하고 기다리다가 테이블에서 커피 자국과 커피 가루가 묻어 있는 오래된 노트를 발견했어요. 커버에 수놓아져 있던 글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안전한 항구는 항상 존재한다. 어디를 봐야 하는지만 알고 있으면 된다." 왠지 노트를 펼치면 항해 중 비상 상황에 대한 대책과 주변 항구에 대한 정보가 빼곡히 적혀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노트의 정체는 '카페 방명록'이었지만요.)

인간에게 가장 큰 기쁨이나 가장 큰 슬픔은 '예상치 못한 것'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기쁨으로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어두고, 현재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불행에 대해서는 이리저리 손 안에서 굴려보고 최대한 감당할 수 있는 크기로 줄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카일과 세이미도 이렇게 미리 불행의 크기를 줄여두었던 걸까요. 당신도 지금 망연한 두려움을 느낀다면 예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과, 그에 대한 시나리오를 한번 써 보세요. 불안과 두려움은 전염성이 강하며 주위도 싸늘하게 만듭니다. 바꿔 말하면, 나의 불안이 줄어듦으로써 나도 내 주변도 함께 따뜻해진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언젠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외치고 싶을 때, 정말 아무것도 없는지 잘 살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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