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새고 있던 물 덕분에 얻게 된 깨달음 두 방울

2022. 3. 1. 13:01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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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빠른 시간에 원인을 찾고 해결하는 기술력에 50만 원을 지불했습니다. 엉뚱한 원인을 찾느라 바닥과 싱크대를 뜯고, 시간과 마음 쓰는 걸 감안한다면 수긍이 가는 금액입니다. 누군가 이 글을 읽고 큰 비용 들이지 않고 문제를 해결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남깁니다.


휴일 아침, 모처럼 늦잠을 잘 수도 있었지만 출근할 때보다 겨우 30분 더 자고 일어나버렸습니다. 부엌에서 분주한 움직임이 느껴졌지만 어쩐지 엄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가만 보니 싱크대 앞에서 엄마의 머리 꼭대기가 잠깐 보였다가 다시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 엄마, 뭐 쏟았어?
- 매트가 축축하게 젖어있네. 물을 쏟은 것도 아닌데.
- 싱크대 밑은 확인해봤어?
- 열어봤는데 물이 흐른 흔적은 없는데.

거실에서 글을 쓰려고 노트북을 열었지만 눈앞에 벌어진 사건에 자꾸 마음이 쓰였습니다. 냄비와 프라이팬을 꺼내서 플래시를 켜고 수도관 쪽을 살펴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수도가 올라오는 쪽 바닥에 물이 흥건했습니다. 여기서 고여있던 물이 조립식 나무 바닥 틈새로 비집고 올라오는 모양이었습니다. 언제부터 물이 새고 있었던 걸까. 어느 배관에서 문제가 터진 거지? 일요일이라 우선은 아파트 관리실에 먼저 연락했습니다. 직원이 도착해 보일러 분배기 쪽을 봐주었습니다.

- 바닥을 뜯어내야 할 수도 있겠는데요. 오늘이 일요일이라 일단 월요일 오전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 모를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서 내일 아침까지는 수도를 잠가두셔야 할 것 같습니다.

관리소장 아저씨의 판단은 내일까지 쓸 물을 따로 받아 놓고 물 공급을 차단해두자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보일러까지 완전히 꺼야했습니다. 날씨가 풀리고 있어 다행이었지만 싱크대까지 들어내는 큰 공사가 될 수 있다는 말에 좀 걱정이 되긴 했습니다.

뉴질랜드 호키티카 강
푸른 빛의 뉴질랜드 호키티카 강 ⓒ2022. 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집(아파트)에서 원인 모를 물이 샐 때 대처 방법>

① 물이 샌 곳 근처 살펴보기
- 물 공급이나 분배가 이루어지는 싱크대 아래 살펴보기

보일러실 확인하기
- 우리 집 물 샘의 원인은 바로 보일러였습니다! 월요일 오후에 방문한 기술자 아저씨 말로는 보일러 안의 호스 하나가 헐거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서 조금씩 흘러나온 물이 배관을 타고 싱크대 아래에 있는 보일러 분배기까지 흘러와 고여 있었습니다.

③ (①, ②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주말을 버텨야 할 경우) 물 받아두기
- 경험 상 가장 활용성이 좋은 것은 "PET병"에 받아두는 것. 그때그때 필요한 용도로 어디서든 쓸 수 있고 입구가 좁고 뚜껑으로 닫아둘 수 있어 먼지나 기타 오염의 확률이 낮습니다.
- 예기치 못한 경우, 이런 상황이 길어질 수 있음에 대비하려면 물을 최대한 아껴 쓰는 게 좋습니다.
- 손 씻은 물, 세수한 물 등은 버리지 말고 화장실 변기 물탱크에 붓기. 변기 물 한 번 내릴 때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사라지기 때문에 기회가 될 때 변기용 물을 확보하는 것이 좋습니다.

④ (③ 이후) 물 잠그기
- 우리집 아파트의 경우 신발장 아래에 수도 계량기가 있습니다. 외부 잠금 장치를 잠그는 것으로 수리 시까지 물 공급을 완전 차단했습니다.

 

ⓒ2022. 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제가 출근해 있는 동안 기술자 아저씨가 방문하셨기 때문에 보일러실 앞의 짐들은 이미 원래 자리로 돌아온 뒤였습니다. 커버를 다시 열고 찍지는 못했지만, 혹시나 바닥에서 새는 물이 의심스럽다면 저곳을 열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호스들이 헐겁지는 않은지 확인해보세요.

ⓒ2022. 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보통 싱크대 아래에 보일러 분배기가 함께 설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진 아래 싱크대 하부 쪽에 물이 고여있었습니다. 고여 있는 물을 발견하고는 신문지와 걸레로 최대한 흡수했습니다. 남아 있는 물기가 곰팡이 등의 2차적인 피해로 이어질 수 있어서 상황을 해결한 후에도 계속 잔여 물기를 없애고 있는 중입니다.

 

수고로움이 주는 깨달음


월요일 아침까지는 어떻게든 받아둔 물로 생활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엄마는 그냥 샤워를 안 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샤워를 하지 않았을 때의 짜증과 찝찝함, 분노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여건은 충분한데 안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바가지 목욕' 때문에 아침 출근에 지장이 생길까 봐 일요일 밤에 천천히 씻어보기로 했습니다. 샤워기를 쓰지 않고 어떻게 하면 잘 씻을 수 있을지 고민을 하고 있으니 꼭 뉴질랜드 캠핑장에서 처음 맞닥뜨린 당혹감이 생각났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물을 주머니에 넣고 샤워기처럼 쓸 수 있는 '샤워백'이라도 있었는데 말이지요. 정말이지 체감 상 중세시대(!)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사건의 불편과 수고로움 덕분에 저는 자신에 대한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뉴질랜드에서 길 위의 '샤워'는 참 다사다난했습니다. 샤워시설이 없는 캠핑장에 있다가 몸 한번 씻기 위해 일부러 대형 수영장이 있는 근교로 여행을 간 적도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찬물 샤워라도 가능한 곳을 발견하기도 했고, 유료로 따뜻한 물을 5분 동안 쓸 수 있는 곳에서 지내다가 마침내 온수를 무제한으로 쓸 수 있는 럭셔리 캠핑장을 경험해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순차적으로 레벨업을 한 것은 아니지만, 어제는 풍요로웠던 상황이 다음 날에는 정반대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안 그래도 불안한 영혼에게 이 불안정한 상황은 꽤나 가혹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도 훈련(?)이 된 덕분인지, 지나간 과거는 설탕 가득한 기억으로 포장해버리는 뇌 기능 탓인지 길 위의 여행이 그리워질 때가 많습니다. 지금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면서요. 바가지에 물을 퍼 머리 위로 쏟으며 샴푸나 비눗물이 얼마나 빠졌는지 제대로 알 수 없는 상황과 함께 잠시 오래 전으로 추억 여행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보일러를 때지 않아 조금씩 식어가는 집은 예전에 여행지에서 머물던 집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파리의 첫날,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5층 계단을 올라간 13구역의 작은 다락방. 겨울날 차가운 대리석과 천장의 벽화로 둘러싸인 호화스러운 작은 방에서 언니와 오들오들 떨던 남부 이탈리아의 오래된 방. 뉴질랜드에서 만난 목가 주택들도 모두들 어딘가 낯선 한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온실 속에 갇혀 있는 기분이 들어 떠났던 부산 집이었고 보일러의 따뜻한 기운은 내가 체감할 수 있는 '과잉보호'와 비슷했습니다. 그런 보일러가 강제로 종료되자 해방감이 느껴진 것이 참 웃기는 일이지요. 이 불편함 덕분에 나는 언제든 안정을 탈출할 수 있고 그러고 싶어 하며 그게 어떤 순간이든 나의 세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기회로 삼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발견한 습성이 하나 더 있습니다. 저는 비상 상황이 되면 누구보다 긴축 작전을 쓴다는 것입니다. 필요하지 않은 항목에서 돈을 쓰지 않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돈을 모으는 것에 짜릿함을 느낍니다. 어쩌면 그 습성에서 돈이 많이 들지 않는 글쓰기나 독서에 취미가 생긴 걸지도 모릅니다.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작정 인기 많은 곳, 좋은 곳보다는 나에게 필요한 공간 자원을 발굴하고 그곳의 문화를 발견하며 나의 방식으로 기록하는 여행을 선호합니다. 최근에는 낯선 자동차를 경험하는 기회를 중요하게 생각해 나머지 비용을 대폭 줄이며 여행했습니다. 이렇게 다른 부분에서 절약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부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한정된 자원 안에서 필요한 순간 정말 원하는 항목에 제대로 쓰고 싶었습니다. 이번에 물 공급을 중단했을 때에도 미리 받아둔 물도 넉넉했고 어떻게든 외부에서 물을 더 확보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무언가 본능적으로 아껴 쓰고 싶은 충동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샤워할 때를 염려해 아껴 쓴 것이겠지만, 정작 그 시간이 찾아왔을 때에도 정말 최소한의 물만을 사용했습니다. 저는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자유의 가능성을 최대한 연장시키기 위해 얼마든지 보수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부류였습니다.

속박에서 해방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히피나 집시 같은 성향, 자유를 위해 한없이 스스로를 제한하는 사람이 되는 이중적인 면모를 내 삶에 잘 적용시킬 수 있으려면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고민은 집에 물이 새기 전 계속 이어오던 생각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자유를 위한 수단을 계속 확보해나가는 것이 일단은 내 성향에 맞춘 최선의 일상이라고 조심스레 생각을 마무리했습니다.

무언가 상황이 불편해질 때는 「지금 현재의 상황이 가장 베스트」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이롭습니다. 현재의 눈높이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조금이라도 개선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적용하는 것은 적응의 또 다른 기쁨입니다. 늘 견고하기만 하던 온실이 이렇게 단 하루 제 기능을 하지 못했지만, 저는 이런 불편함이 한편으로는 너무나 반갑고 다행이었습니다. 안정과 불안정, 긴 호흡으로 안정의 삶을 유지하고, 그 호흡을 사용해 불안정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 저는 자유를 머금기 위해 제가 가진 자원을 아끼며 사는 성향이라는 것을 다시 느낄 수 있었던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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