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솔직함에 대하여

2021. 10. 3. 19:51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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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일 때 쓰던 가벼운 일기들은 사춘기를 겪고 어른이 되어 사생활을 누릴수록 그 내용이 풍부해집니다. 금고에 넣지 않는 이상 종이 다이어리에는 보안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100% 솔직하게 기록할 수 없는 일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가끔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를 다 밝힐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떠한 사건에 얽힌 관계 때문일 수도 있고, 가끔은 세상의 눈에서 벗어난 일들을 삶에서 허용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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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함 1. 기록자의 절벽


기록자 스스로 솔직함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순간은 이야기하고 싶은 일이나 주제에 대해 글을 쓸 때입니다. 저는 이 순간을 '기록자의 절벽(Author's Cliff)'이라고 부릅니다. 그 다음 문장에서 어떠한 사실을 전달할 경우, 마치 절벽 끝에서 한 발을 내딛는 것처럼 아래로 홀라당 떨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낭떠러지 밑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잃을 수도 있고, 어딘가에 부딪혀 뼈가 아작날 수도 있고, 별 일 없이 바닷물에 빠져 해변으로 나올 수도 있습니다. 진실(혹은 진심)을 뱉은 후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어요. 꼭 법정에 선 증거인이 아니더라도 흔한 일상 속에서 솔직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상당합니다. 어떤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아무리 이니셜로 숨기고 은유로 무장하더라도 누군가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괜히 망설이게 될 때가 있는 것처럼요.

내가 쓴 문장이 어딘가로 흘러가 책임지기 어려운 일들을 만들어내고, 저 사람이 언젠가 나에 대해 이상한 이야기를 쓸지도 몰라- 하며 주위에 사람 하나 없는 외로운 섬이 되는 것은 우리가 결코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저는 이런 상황이 생길 것 같으면 쓰고 있는 글의 주제에 대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드러낼 정도로만 사적인 영역을 개방합니다. 무척 신중하게, 불필요한 내용은 빼고, 메시지와 관련된 내용을 중심으로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서술하려 노력합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글이 의식을 넘어 저를 압도하는 순간이 오면 필요 이상의 진실을 실토하게 될 때가 있거든요. 이런 부분은 퇴고할 때 글과 조금은 멀어져서 다시 읽어보며 판단합니다.



솔직함 2. 알고 있는 언어를 조합해 만든 비밀 문자


다섯살 때부터 써온 일기의 최다독자 1위는 나, 2위는 아마도 '엄마'가 아닐까 싶습니다.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의 그림일기나 학창시절 때 다이어리는 백번 양보해서 보호자인 부모로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대학 시절, 타 지역에 독립해 생활하는 딸의 다이어리는 어머니에게 ‘판도라의 상자’와 비슷합니다. 딸은 점점 멀어져가고, 딸이 형성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가 기록된 다이어리들은 한창 모녀 간의 가치관 싸움이 극에 달해 있던 시기에 한번 펼쳐보고 싶으니까요. 제가 엄마라도 참기 힘들 것 같습니다. ‘어, 음, 설마 엄마가…?’ 라고 생각할 무렵 아버지의 귀여운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엄마가 딸내미 일기장을 몰래몰래 읽어보든데. 니 알고 있나?" 처음에는 엄마가 사생활을 훔쳐 보려한다는 사실이 불쾌하기도 했지만, 그때 제가 읽고 있는 책들과 영향을 받은 인용구들, 100% 진심인 생각들을 물리적인 싸움 없이 엄마에게 전달하는 수단이 되기도 해서 속이 시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혼자만 알고 싶은 일이나 생각들은 이미 <특별한 장치>를 해두었기 때문에 사실은 타인에게 일기를 들켜도 큰 타격이 없었습니다.

영어와 한국어의 원리, 수십가지 그림을 섞어 만든 비밀 문자는 17세 때 처음 만들어 지금까지도 요긴하게 쓰고 있습니다. 그 당시 친한 친구들에게 이 비밀문자를 전파해주기도 했지만, 그 친구들 중 아직까지 그 문자를 쓰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아요. 철저한 보안 유지를 위해 예시는 공개할 수 없습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엄청난 천재분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만든 비밀 문자는 쓰는 것보다 해독하는 속도가 약 1.4배 정도 느립니다. 점자를 읽듯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짚어 읽어나가야 합니다. 2007년 이후 다이어리에 중간중간 문신처럼 새겨져 있는 비밀 문자는 가장 중대한 고민과 육두문자를 포함(!)한 100% 솔직한 생각을 담아낼 수 있는 장치로 그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말로 할 수도 없고 올바른 글로도 내보일 수도 없는 상황에서 비밀 문자로 거침 없이 글을 쓰는 순간은 정말 통쾌합니다. 눈치 볼 일이 없으니 정신심리 치유 효과가 짱짱하지요. 비밀 문자로 쏟아낸 문장 사이에서 생각이 가다듬어지기도 하고 격앙되었던 감정이 바늘 구멍이 난 것처럼 스르륵 풀리기도 합니다. 일기 정도에서 머물 기록이라면 자기만의 비밀 문자를 만들어 보는 것도 추천합니다. 스스로 규칙을 기억하고 손과 눈에 익을 때까지 사용해야 하고 또 너무 많이 남발하지는 않아야 ‘비밀’로서의 역할 수행이 조금 더 길어지겠지만요. 요즘은 인터넷 기록도 믿을 수 없는 시대이니 이러한 방식을 이용해 완전히 아날로그로 돌아가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함 3. 시절인연을 기록하는 일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 글을 쓰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기록자는 어떻게든 그 표현을 멈추지 못합니다. 기록하는 사람에게 ‘사랑’이 찾아오면 그것을 솔직히 기록해야할까요, 일단 숨겨야 할까요? 일반적인 인연이 아니라 가치관, 취미, 삶의 방향까지 함께 맞추어가던 사이라면 저는 가능한 기록도구를 총동원해 곁에 있는 이를 담아내고 기록합니다. 그런 존재라면 그 시기에 남기는 모든 기록물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연이 끝나고 나면 남아 있는 기록들을 정리하느라 곤욕을 치루곤 합니다. 함께 나눈 시간에 대한 글과 사진에는 정성과 혼신을 다한 흔적들이 역력합니다. 오래 전 일이지만 이곳에도 70여 편의 글이 있었고 인연이 다한 후 모두 사라진 상태입니다.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함께 경험한 공간들을 기록했지만 어쨌거나 그때의 기록과 추억들은 ‘완성된 결과물’에서 다시 다른 글을 위한 ‘재료’의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언젠가 논픽션이 아닌 허구의 이야기를 쓸 기회가 있을 때 그때의 기록들을 이용해볼까 합니다. 아니면 사람은 쏙 빠지고 그때의 공간만을 주제로 한 글로 새롭게 바뀌어 세상에 나올 수도 있고요. 사랑은 사라졌어도 그때의 정성과 노력까지 함께 잃을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마지막 연애 이후로 오랜 기간동안 다시 누군가를 마음에 두는 상황이 오지는 않았습니다. 중간에 몇 번의 기회는 있었지만, 드러낼 수 없고 기록할 수 없는 단계는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 같아요. 기록하지 않고는, 표현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마음. 양질의 대화를 나누고 있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으며, 함께 하는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사람은 정말 귀한 사람이고, 그런 선한 영향력을 삶에 맞딱드리고 있다면 이미 어떻게든 기록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기록하고 싶은 사랑의 시간이 찾아올 때 저는 또 한번 최선을 다해 기록을 남길 것 같습니다.


기록을 하는 사람은 텅 빈 여백 앞에서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을까요. 솔직함은 매번 다른 상황 속에서 결여와 과잉 사이의 적절한 지점을 찾아 글자에 녹아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나 하나쯤 완전히 솔직해져도 이 세상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어떤 때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SNS에서 무수한 '실수'들을 남기고 있는 유명인들의 사례만 봐도 무언가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것은 일반인이라도 주의가 필요합니다.

기록에서 솔직함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하고 싶은 말들은 꼭 에세이의 언어가 아니더라도 문학의 형식을 통해 전달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저는 아직 문학의 언어로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표현해본 적이 없지만, 언젠가 스스로의 세계에 신뢰가 생길 때 그 속에 흠뻑 빠져들어 무의식에 숨어 있었던 문장들을 하나하나 찾아내보고 싶기도 합니다. 솔직함이라는 '물'을 어떤 그릇에 담을지, 누군가에게 끼얹을지, 내가 그냥 마셔버릴지, 화분에 부을지 선택하는 것은 기록자의 몫입니다. 사유를 이어나가다보니 솔직하느냐 마느냐 보다는 그 솔직함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가 더욱 중요한 문제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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