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과 빛 한 줌이 삶에 미치는 영향

2018. 9. 3. 06:24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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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29일 수요일

내게 잘 맞는 루틴 찾기

아침이 창의적인 활동을 하기에 가장 좋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책에는 이른 새벽에 글을 쓰기 시작하는 작가들에 대한 소개와 함께, 작업 시간을 아침으로 옮기고 기적적으로 능률이 올랐다는 것, 잠을 자는 동안 뇌가 기억 분류 작업을 끝내놓아서 지난 밤에 고민하던 문제가 갑자기 해결이 되었다는 것, 등등 증명 가능한 경험과 이론들로 가득 했습니다. 나에게 맞는 이상적인 시간대를 찾기 위해 이리 저리 실험해보고 있는 중이었기에 몇 번은 일어나자마자 만사 제쳐두고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작업을 먼저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썩 몰입되지 않고 무언가 어색하고 불편했어요. 아침 기운은 언제나 좋습니다. 하지만 그 '불편한 기분'은 어디서 생겨난 것이었을까요.

제 행동 특성을 분석해보고 이번 주에는 패턴을 바꿔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월요일부터 바로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했어요. 저에게는 [숲 산책 → 식재료 다듬기, 청소, 빨래 등 자잘한 일 완료 → 작업 / 독서 / 휴식 시간의 자유로운 전환]의 루틴이 잘 맞았던 것입니다. 우선 저는 글을 쓰는 호흡과 책을 읽는 호흡이 무척 긴 편입니다. 글을 쓰다 책을 읽기도 하고, 책을 읽다가 글쓰기를 계속 이어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안한 기분의 원인은 그 호흡을 끊을 타이밍을 찾아야하는 것에 있었던 것 같아요. 작업을 하거나 책을 읽다가도 '양파랑 당근 썰어서 재료통에 담아놔야 하는데… 언제하지?', '미리 밥 해서 봉지에 분류해야하는데… 언제하지?', '청소기 돌리고 정리를 좀 해야하는데… 언제하지?'라는 생각이 온전한 몰입을 방해했던 것입니다. 글이 너무 쓰고 싶고, 책이 너무 읽고 싶더라도 나중에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그날 해야할 것들을 미리 다 해놓는 것이 만족스러운 하루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이 작은 삶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면 일상에 찾아온 무력감을 건강하고 기분 좋은 방식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너무 하기 싫어 눈물이 날 지경이라도 그날 하겠다고 다짐한 일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 결국 완수하고 나면 깊은 자긍심을 느낍니다. 물론 '누군가 시켜서 한 일'을 이런 식으로 한다면 영혼이 남아나지 않겠지만, 자발적으로 내 자신과 약속한 일을 지키는 것은 굉장한 경험입니다. 오후 늦게까지 작업을 하다보면 내가 오전 시간에 청소를 했다는 사실 마저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피곤해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이미 한참 전에 끝내 놓은 일들을 바라보면 현재 확보된 완전한 시간에 무척 감사한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뉴질랜드의 숲
Bonito Scenic Reserve, Auckland, New Zealand / ⓒchaelinjane, 2018

 

빛에 대한 신뢰

오늘은 아침에 폭우가 심하게 쏟아졌습니다. 서러워서 안달이 난 아기처럼 조금 멎다가 또 울음을 터뜨리고, 조금 진정이 된 이후에는 잔울음이 지속되었습니다. 어제 글로 제출했던 숲 산책은 즐기지도 못했습니다. 온통 진흙탕이 되어 있겠지. 대신 아침 시간은 오늘 해야하는 작은 일들로 부지런히 채웠습니다. 호흡이 끊길 만한 것들을 다 처리하고 나니 오후 1시 22분이었어요.

그 때쯤 햇볕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폭우가 쏟아진 날씨라고는 믿기지 않게 힘 있고 강렬했지요. 뉴질랜드라는 곳의 날씨에 적응한 지 다섯달 쯤 되어가니 비가 내리고 있어도 금방 밝은 햇살이 쏟아진다는 사실을 몸이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지낼 때 '오늘은 비가 와도 내일은 해가 뜰거야' 정도로 날씨 변화를 감지하는 게 느슨했다면 , 이곳에서는 '지금은 비가 와도 한 두 시간 후에는 해가 날거야'로 날씨 전환의 속도가 무척 빨랐습니다.

나 또한 이런 생소한 속도를 자연스레 따라가게 되었고, 매일 잊지 않고 잠깐이라도 강렬하게 쏟아지는 빛의 에너지 덕분에 자연을 더욱 깊게 신뢰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대상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긍정적인 항상성'에는 '높은 확률로 그러하다'는 신뢰가 생깁니다. 이곳의 햇볕은 워낙 강렬한 까닭에 단순히 밝다는 느낌이 아닌 시각뿐만 아니라 '촉감'까지도 동반한다. 매일매일 어깨를 토닥여주며 「잘 하고 있어!」 응원해주는 존재를 어느 때고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깊은 위로를 선사해주는 주체는 제 삶의 총합을 넘어, 모든 인류의 삶의 시간을 합한 것보다 더 큰 우주적 존재이기에 사라지지 않을 거란 믿음을 줍니다.

이렇게 햇볕을 '실체'로 실감하는 건 인지능력이 자란 후 처음으로 가장 자연 가까이에 살면서부터입니다. (도시에 있는 부모님 집은 온전한 나의 공간이 아니니 제외하도록 할게요.) 낡은 하숙방에서, 햇볕 한 줌 들어오지 않던 대학가의 4평짜리 방을 지나고, 아주 잠깐 햇볕이 스쳐가던 10평짜리 방을 지나고, 햇볕은 많이 들었지만 아주 불편했던 뉴질랜드 첫 방을 지나, 마침내 햇볕이 풍부하고 조금은 덜 불편한 이곳에 살면서 제 삶에도 빛이 점점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내 삶의 빛줄기', 무슨 촌스러운 비유 같지만 광량이 풍부해질수록 저도 푸르러지는 기분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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