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창작은 충동과 영감을 숭배하는 일, 패티 스미스의 『몰입(Devotion, 2017)』

2022. 2. 26. 00:00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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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제가 주말마다 부산에서 거제를 오가는 기록 작업을 시작하기 전이었습니다. 어렸을 적 일기에서 거제 몽돌해수욕장에 갔다는 기록을 발견했지만 그에 대한 명확한 기억은 없었습니다. 그저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딱딱하면서도 부드러운 자갈의 감촉과 갑자기 수심이 깊어지는 구간이 많아서 당황했던 것 정도가 어렴풋하게 떠오를 뿐이었지요.

어른이 되어 처음 거제에 간 날,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거제 장목면에 있는 '책방 익힘'이었습니다. 그곳을 둘러보다 강하게 끌리는 책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패티 스미스의  『몰입』. 그녀의 이름을 보자마자 오래 전 목록에 올려두고 아직까지 읽지 못한 책 『저스트 키즈』가 떠올랐습니다. 책의 서문을 슬쩍 읽어보니 이 책이 그녀의 책을 읽지 못한 아쉬움과 함께 나의 어떤 갈증까지도 해소해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합창이 터져 나온다.
그저 살기만 할 수 없어서.

─ 패티 스미스, 『몰입』의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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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정리하며 책읽기
카페에서 정리하며 읽은 패티 스미스의 『몰입』 / ⓒ2022. 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시몬 베유 - 알베르 카뮈 - 패티 스미스,
우연의 도화선이 이끈 맹렬한 충동

이 책은 '나는 왜 글을 쓰는가(Why I Write)'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입니다. 예일대학교 출판부가 윈드햄 캠벨 문학상 재단과 함께 글에 인생을 바친 작가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시작한 시리즈라고 합니다. 『몰입』의 본문은 총 세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장은 패티 스미스를 우연한 창작으로 이끈 여행의 앞부분이 기록되었고, 그렇게 탄생한 단편 「헌신」의 전문이 두 번째 장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장에는 패티 스미스가 단편을 토해내기 직전, 알베르 카뮈의 미완성 유작 『최초의 인간』 자필 원고를 손에 쥐고 글쓰기의 '부름'을 강하게 느끼는 과정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글을 쓰고 싶은, 써내야만 하는 패티 스미스의 강렬한 충동은 독서를 마친 독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에 대한 패티 스미스의 대답은 이 일련의 창작 사건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을 통해 우리에게 똑같은 충동을 일으킵니다.

 

글쓰기를 향한 순례

여행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우연'이 작용하는 방식은 우주만큼이나 방대합니다. 인간의 작은 '의도'들은 거대한 우연의 법칙 아래에서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패티 스미스가 최후의 창작에 다다르는 모든 과정에도 계획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저 매 순간 주의를 기울이며 무의식의 어떤 것과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었을 뿐입니다.

패티 스미스는 책 홍보를 위해 갈리마르 출판사와 함께 비즈니스 여행을 떠나기 전날, 우연히 본 <리스뚤레스(Risttuules, In the Crosswind, 2014)>라는 에스토니아 영화의 예고편을 발견하고, 그 후에 관련 동영상을 더 찾아보다가 백색과 자작나무의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이는 후에 패티 스미스의 「헌신」 속 배경 이미지가 되고, 여성 화자 에르마의 목소리에 이끌려 아직 플롯도 없는 단편을 쓰는 상상을 시작합니다.

 

영화 <리스뚤레스>의 예고편

 

(아마도) 패티 스미스가 <리스뚤레스>의 예고편을 본 이후에 찾아낸 좀 더 긴 영상

 

갑작스레 변경된 일정으로 급히 여행 짐을 챙기는 와중에 프란신 뒤 플레식스 그레이가 쓴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에 대한 논문과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소설 『혈통』을 챙겨옵니다. 호텔 방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가져온 논문을 읽으며 천재성과 특권을 버리고 혁명과 봉사, 희생이라는 어려운 길을 선택한 베유의 삶에 매료됩니다. 호텔 방에서 우연히 피겨 스케이트 챔피언십 대회를 보게 되고, 마지막 순서로 등장한 열여섯 살의 최연소 러시아 선수의 태도와 모습에서 돌연 영감을 얻습니다. 시몬 베유의 이미지와 러시아 피겨 스케이팅 선수의 이미지는 패티 스미스의 꿈속에서 뒤섞이며 단편 속 「헌신」의 인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갈리마르 출판사 건물에서 알베르 카뮈가 예전에 사무실로 쓰던 방을 구경하던 패티 스미스는 그곳에 있던 시몬 베유의 책을 발견합니다. 알베르 카뮈는 베유를 "우리 시대의 유일한 위대한 정신"이라고 묘사했으며 그의 생애와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기 위해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베유는 철학을 공부하면서도 노동자들의 삶에 함께 했으며 정신적 노동과 육체적 노동의 상하 구조를 붕괴시키고자 노력하여 '행동하는 지성'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패티 스미스는 산책을 하던 중 베유 가문의 집이 있던 곳에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 전 이곳으로 순례를 왔던 카뮈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남부 프랑스 여행 중 세트에서 작가 폴 발레리의 무덤을 찾은 패티 스미스는 오래된 묘석에서 우연한 글귀를 발견합니다. DEVOUEMENT. '헌신'이라는 뜻. 이는 그녀가 쓸 단편의 제목이 됩니다. 세트의 조용한 공원과 파리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패티 스미스는 정신없이 단편을 써내려 갑니다. 카페에서 먹은 음식마저 그녀의 글 속에 온전히 녹아듭니다. 

애시포드에 있는 시몬 베유의 무덤에 라벤더를 봉헌하는 것으로 첫 번째 장은 마무리되고, 곧이어 단편 「헌신」으로 이어집니다. 아래는 위의 모든 과정이 패티 스미스의 언어로 함축되어 표현된 부분입니다.

"운명에는 손이 있으나 그 손이 미리 정해진 건 아니다. 나는 무언가를 찾다가 무언가 다른 것을, 어떤 영화의 예고편을 찾았다. 울림이 깊지만 생경한 목소리에 마음이 동해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인용과 참조의 교향악을 소환하는 빛의 주크박스에 이끌려 여행을 떠났다.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추상적 거리들을 배회하며 심지어 내 것조차 아닌 세계를 실로 엮었다. 책 한 권을 읽고 시몬 베유의 신비적 행동주의를 알게 되었다. 한 피겨 스케이트 선수를 보았고 완전히 매혹되었다. (...) 아마 「헌신」은 세계관의 족쇄에 구속되지 않은 그 자체리라. 아니 추적할 수 없는 공기로부터 끌어온 은유리라." (p.46-48)


첫 번째 장에서 시몬 베유의 무덤을 찾는 것으로 끝난 줄 알았던 이야기는 단편이 끝난 후 마지막 장에서 애시포드 이후에 알베르 카뮈의 딸 카트린의 초대를 받아 루르마랭으로 향한 뒷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알베르 카뮈의 자필 원고를 짚은 패티 스미스는 마침내 경건하고 참을 수 없는 글쓰기의 충동을 온몸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책을 옮긴이(김선형)는 책의 제목을 『몰입』으로, 패티 스미스의 단편을 「헌신」으로 각각 번역했습니다. 둘 다 원제인 'Devotion'을 번역한 말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이를 '심성봉헌(心性奉獻)'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해석에 의하면,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 육신과 마음을 온전히 바친다는 뜻입니다. 프랑스어에서는 마음속으로 소리 없이 기도하는 행위(silent prayer)'와 '고요하게 집중해 깊이 생각하는 행위(meditation)'를 함께 아우르는 묵상이라고 합니다. 패티 스미스가 말하고자 하는 창작에서의 Devotion은 종교적 의미에 가까워질 만큼 순수한 몰입의 경지에 온 마음을 바치는 행위와 비슷할 것입니다.

패티 스미스는 '여행의 모든 순간을 무의식과 결합하여 글을 창작해내는 과정'과 단편의 주인공인 '유지니아의 태도'를 통해 예술의 목적과 동기를 자연스럽게 드러냅니다.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작가의 보이지 않는 창작 과정과 영감을 다루는 순간을 목격하고 그 결과물까지 함께 확인할 수 있도록 이끌어줍니다. 여행을 떠나는 누군가의 손에 이 책이 쥐어진다면 앞으로 마주할 모든 시간들에 온전히 몰입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영감이 잠시 무뎌진 예술가는 일상의 모든 순간이 창작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다시 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연차를 쓴 귀한 날에 우연히 이 책을 다시 읽기로 결심했습니다. 맨 처음 무심코 읽어 넘겼던 부분을 카페에서 다시 정리하며 패티 스미스가 발견했을 영상과 책 속에 등장하는 작가와 사상가의 정보를 찾아보았습니다. 소중한 시간에 이 글을 쓰게 된 것도 그녀의 충동을 이은 작은 헌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쓰는 글과 담아내는 사진들이 결코 궁극적인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마저도 '나보다 훨씬 나은 무언가'가 되리라 믿으며 경솔한 시행착오를 끊임없이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순수한 몰입의 형태라면 <언어의 허리띠를 졸라매고 놀이와 친구들과 사랑의 계곡에서 한 박자 바깥으로 물러서>는 시간도 달뜬 행복이 될 수 있을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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