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에 맞는 직업, 과연 존재하는 걸까?

2023. 3. 26. 21:00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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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마지막 주 금요일을 끝으로 부산에서의 직장 생활을 마쳤다. "미쳤네! 퇴사 기분 제대로 만끽하는구나?" 폭풍 같은 업무 이후 단 하루 쉬고 새벽부터 출국. 내가 봐도 아주 떠나고 싶어 환장한 사람 같다. (실상은 저렴한 티켓을 구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을 뿐이지만!) 밀라노로 떠나는 비행기에서 2023년의 첫날을 맞이했다. 휴가와 일이 섞인 '워케이션(Workation)'으로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한 달 반 가량 지낼 계획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기록자로서 또 다른 일을 시작하는 3월이 되기 전, 그동안 무진 애써 왔던 나에게 특별한 작업 환경을 실험해 보고 싶었다.

새로운 영역으로 걸어가는 나 (사진제공 : Marco Jehle) / (c)2023. 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이전 직장에서 얻은 것


    새벽부터 한낮까지 정신없었던 시간이 지나가고 비행기에서 숨을 고르고 있으니 그동안 후루룩 지나갔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4년 5개월, 한 직장에서 다양한 일을 경험하며 일머리를 키운 시간이었다. '어떤 일이든 맡은 분야를 책임감 있고 효율성 있게 완성하는 법'을 연습했다. 시작은 거창하나 마무리가 잘 안 되는 것이 나의 고질병이었다. 쓰고 있는 글이 산으로 가기도 하고, 계획서를 쓰다가 길을 잃은 적도 허다하다. 하지만 어떻게든 끝마쳐보려고 애썼다. 일정한 엑셀 포맷을 사용하고 있다가도 좀 더 효율적인 방식을 알게 되면 전부 갈아엎고 적용해 보고 또 고쳐보기도 하면서. (이 또한 비효율이 아닐까 조마조마했다.) 중간 일정 변경, 나의 업무가 아니지만 들리거나 흘러지나가는 정보들(나중에 필요한 경우가 꽤 많았다!), 어쩌면 지독한 기록쟁이가 된 것은 일의 완성까지 이를 단 하나의 실마리라도 잡기 위해서, 그렇게 일을 그르칠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자는 절실한 마음에서 비롯된 걸지도 모르겠다.

    외동으로 태어난 나에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동료들과 호흡을 맞추는 일'이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지녀야 하는 태도는 오랜 시간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얻기 어려운 감각이다. 이전 직장은 청년들이 운영해 나가는 기업이라 동료들과 친구처럼 다정한 시간을 많이 보냈다. 수많은 고민을 나누는 사이였기에 거의 자매나 다름 없었다. 나와 대표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술을 전공한 동료들이라 이들이 발산하는 자유로운 에너지가 나에게는 무척 큰 힘이 되어주었다. 어떤 돌아이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다 받아주는 동료들을 곁에 두는 것. 덕분에 장난기 가득한 내 안의 또 다른 자아를 자연스레 꺼낼 수 있었다. 뼛속 깊이 발랄한 동료들이었지만, 약점을 보완하고 성장하려는 욕구가 강한 사람들이라 회사 운영에 체계를 도입하고 체질을 개선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반짝이는 친구들이었다.

    그리고 유일한 이과 출신인 대표님과 호흡을 맞추면서 장황하기만 하던 나의 사고체계에도 변화가 생겼다. 필요한 정보만 간략히 전달하기, 혼자 다 하려 하지 말고 동료들에게 필요한 작업 요청해서 일 처리 속도 높이기, 의견을 낼 때는 근거와 대안을 제시하기 등의 '효율'과 '논리'가 내게도 조금씩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성격과 태도를 도입하는 일은 당연히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부터 길러진 효율과 논리가 평범한 일상생활에도 스며들어 나는 지금 '살짝 예민하긴 하지만 그래도 정돈되고 안정된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건 기적과도 같은 일인데, INFP가 쿠크다스 멘탈이라는 이야기는 적어도 나에게는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좋아하는 일과 깊게 엮이는 방법


    직장을 다닐 때 나에게는 대원칙이 있었다. 외부 일을 작정하고 찾지는 않지만, 주위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일 중 능력치 향상에 도움이 되거나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본업에 (무조건) 무리가 가지 않게 해낼 것. 그렇게 입사한 지 1년째 되는 겨울, 음악 프로듀서가 된 오랜 친구의 부탁으로 가사 번역 작업을 시작했다. 투잡의 서막이었다. 이 일이 3년이 넘도록 이어지는 것은 물론, 한 달에 한두 곡 번역하던 게 점점 늘어나면서 작년 12월은 초년생 월급에 육박할 정도로 작업이 늘어났다. 글쓰기 감각을 익히는 단련, 모국어와 외국어를 깊이 있게 사용하는 연습, 그리고 단시간에 상상력을 끌어올리는 훈련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는 기회는 그야말로 축복이었다. 무엇보다 본업에 무리가 크게 가지 않는 선이라 미리 세워둔 원칙에도 부합했다. 오히려 문학적인 표현을 필터링 없이 표출할 수 있으니 말로 하기 어려운 감정을 가사 번역으로 풀 수 있어 쾌통했다. 퇴근 이후의 시간과 주말을 자진반납해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시간이었다.

    나에게 잘 맞는 일거리를 만난 건 행운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 이름 없는 뜻밖의 행운이라도 '분야와 영역'은 있기 마련이다. 이십 대 초반에 음악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모자란 글이라고 생각해 그저 꽁꽁 숨겨두었다면, 예술가로 살고 싶어 안달난 마음을 혼자만 안고 있었다면 친구와 나의 인연은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우선 좋아하는 것들을 마구 드러내야 한다! 유난히 재밌고 계속 공부하고 싶은 분야를 만날 수도 있으니까. 하고 싶은 게 분명하다면 더더욱 드러내야 한다. 행운의 먼지 한 톨이라도 마주칠만한 길목으로 자신을 데려다 놓는 것이다. 화려한 행운은 없더라도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 자기만의 아카이빙을 해나간다면 그 또한 재미와 함께 꾸준한 습관 하나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니 잃을 게 하나도 없는 일이다.

    이런 형태의 삶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늘 주어진 24시간을 더욱 유연하고 농밀하게 쓰는 삶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매일 아침 출근 준비를 할 때마다 지금 당장 책상 앞에 앉아 생각나는 문장들을 쏟아내고 싶은 충동이 부글부글. 밤 늦도록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은데 다음 날 출근이 부담되어 안달이던 새벽. 하루동안 허락된 시간을 최대한 쏟아부어도 모자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기록자, 새로운 기회를 마주하다


    친구의 회사가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 직원을 여럿 둘만큼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은 작년 여름, 고민 끝에 서울로 생활 무대를 옮기기로 결심했다. 재택근무가 어느 정도 가능한 환경이라 내가 바라던 일의 형태에 훨씬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십 대 초반부터 나의 작은 재능을 소중히 여겨준 친구. 모든 게 처음일 때부터 서로가 차근차근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거의 10년 가까이 지켜보고 있다. 음악이 취미였을 때도, 비즈니스로 처음 시작할 때도 친구는 언제나 프로처럼 자기 일을 대했다. 타인에게서 피드백을 받을 때 낮은 위치에 서는 걸 머뭇거리지 않는 태도를 보고 '사업은 이렇게 하는 거군.'이라고 생각했다. 메시지로 연락만 주고받던 다른 동료들도 이제는 얼굴을 마주하며 팀원으로서 여정을 함께 한다.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나는 기록자로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앞으로 마주할 작업 경험은 차차 풀어가도록 하겠다.


"기본적으로 감수성이 풍부하고 사소한 디테일도 놓치지 않는 세심함도 갖고 있습니다. 때문에 예술적 감각이 필요한 일을 한다면 굉장히 잘 어울리겠습니다. 여러 명이 일하는 것보다는 소수 정예나 단독으로 움직일 때 당신의 역량을 더 잘 펼칠 수 있습니다. 공간 디자인, 패션 디자인, 주얼리 디자인, 헤어 디자인과 같이 아름다움을 창조해내는 직업이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딘가에 속박 당하거나 상하 체계를 중요시하는 조직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편이라 일반적인 회사에선 적응이 다소 힘들 수 있으니, 자유도가 높고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직업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자유로운 성향 탓에 사람들과 섞이는 것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으니 마음이 맞고 손발이 잘 맞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탄탄히 하는 것에 소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재미로 본 사주앱에서 '직업운' 파트를 읽어보다가 무릎을 탁 쳤다. (정말 세게!) 그렇지만 자유도가 덜한 환경을 미리 경험하며 타인과 호흡을 맞춰 보고 모자란 역량을 보완하려 애쓴 것 또한 반드시 필요한 경험이었다. 비로소 '자율'을 만났을 때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편한 환경을 미리 피하는 것도 노련한 방법이겠지만, 공상 세계가 아닌 이상 어느 직업군에서나 '맞지 않는 요소'는 존재한다.어설플지라도 불편함에 부딪혀 보는 일은 절대 헛되지 않다. (특히나 나 같은 내향인 INFP들이여! 두려워 말라!) '관계'는 신뢰와 직결되는 영역이고 어떤 기회가 찾아올지 모르는 통로가 된다. 지금껏 손발이 잘 맞는 동료들을 만나왔으니, 새롭게 함께하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며 역할에 몰입할 계획이다.

    오늘 쓴 글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이렇다. "자신에게 완벽하게 들어맞는 직업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하든 거기서 자기만의 통찰(약점 파악・보완, 업무 효율 개선 등)을 얻고 동시에 원하는 분야에 대한 공부와 아카이빙을 멈추지 말자. 거기서 알게 되는 관계에 신뢰를 쌓고 일과 가치관, 삶을 통합하며 궁극적으로 바라던 일의 형태에 다가가보자. 여기에 행운이 깃든다면 더욱 좋고."

    현재 어떤 단계에서 무엇을 개선하고 있는가? 우리는 스스로 고민과 두려움을 깨뜨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일을 배우고 있는 요즘, 두려움을 물리치기 위해 나도 이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때로는 정면돌파! 모르는 것으로 인한 불안과 공포는 공부와 아카이빙을 지속하면서 조금씩 이겨내보자. 일에 완전히 몰입할 때 기이하게도 평온이 찾아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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