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지대 밖에서

2018. 9. 23. 18:56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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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햇살이 좋아서 반팔을 입어도 될 정도였습니다. 엊그제 잠깐 우박이 떨어졌다면 믿을 수 있을까요? 남극 대륙과 열대 지방 중간에 위치한 남위 40도대는 지구의 감정 변화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구간입니다. 아무튼 오늘 이렇게 봄볕을 맞으니 북섬에서 지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합니다. 짚고 넘어가야 할 어떤 일이 해결되는 시기에 맞춰 남섬으로 내려갈 생각이에요.

'가족과 친구'라는 안전지대 밖으로 나온 지도 반년이 되었습니다. 한 달 뒤에는 제가 돌아올 줄 알았던 어머니는 늘 '그만하고 돌아오라'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이제야 무언가를 시작한 것 같은 저로서는 이 모험을 중단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가족의 보호가 존재한다는 건 말도 못 할 행운입니다. 집을 떠나와 방랑객으로 푸대접을 받을 때면 우리를 아껴주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지요.

그렇지만 가족의 일이라면 두 발 벗고 직접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시는 어머니의 영향력 아래에 있으면 자존감을 길러내는 데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물컹물컹한 물침대에 갇혀 있는 기분이 든달까요. 이 거친 세계에서 손톱 하나 다치는 일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요. 하지만 맨 땅을 밟고 지구의 중력으로부터 몸을 일으켜보지 않으면 자신의 무게를 절대로 가늠해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여전히 '태아'일뿐이지요. 다정하고 희생정신이 강하신 어머니의 성격을 바꾸는 건 불가능할 테니 제가 움직여야 합니다. '이기적이다, 저만 생각한다'는 말들을 감내하는 것도 상관없어요. 스스로 흡족할 삶의 방식과 수단을 찾는 것이 지금 제 삶의 시점에서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2018. 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제 속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알맹이─고통이 아니기에 '응어리'라고는 표현하지 않았습니다─가 있습니다. 너무 단단해서 이 6개월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단단한 씨앗에도 싹이 돋듯이 변화는 찾아올 것입니다. 지금도 가슴뼈 가운데로 그 알맹이를 느낄 수 있지요. 제가 여기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끝까지 추적하고 여러 방법들로 표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알맹이가 풀리지 않는 것은, 짐작컨대 이중 삼중 사중의 보이지 않는 장막이 그것을 꼭 쥐고 감추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곳 생활의 마지막에 다다르면 알맹이의 실체도 드러나게 될까요. 제가 그것을 말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가장 가진 것이 없는 시기이지만 하고 싶은 일과 일상 노동으로 채워지는 하루하루가 기대되고 큰 만족을 줍니다. 이렇게 안전지대 밖을 선택했지만, 원하는 일을 지키고 최소한의 영역만큼의 삶을 가꾸며 자신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는 시간들도 생각보다 '실질적인 안전지대'입니다. 삶의 본질로, 풀리지 않은 알맹이로 곧장 걸을 수 있는 길은 바로 여기에 존재하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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