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배우는 것들

2018. 9. 11. 06:00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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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3일 월요일


한국은 조금씩 긴 팔 옷을 꺼내 입을 날씨가 되었겠네요. 이곳은 봄으로 진입하기 직전의 사나운 날씨가 연일 지속되고 있습니다. 남쪽에는 폭설이 내리고 중부 지역에는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고 있어요. 제가 있는 북쪽에는 강한 돌풍과 함께 집중호우가 내리고 있습니다. 역시 대자연의 나라답게 구월의 봄을 향한 환영 인사도 투박하고 거친가 봅니다. 오늘도 하루 종일 흐리고 비가 오다가 오후 네 시가 다 되어서야 강한 햇볕이 났습니다. 빛은 밤부터 얼어 있던 나무 울타리와 흙을 순간적으로 데운 뒤, 아지랑이를 부둥켜안고 흩어집니다. 시간에 형상이 있다면 이러한 모습일까요.

날씨가 좋지 않지만 숲 산책을 멈추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거의 매일 집 앞의 숲을 둘러보는데 아직까지 어느 누구와도 마주친 적이 없습니다. 덕분에 이 작은 숲의 거의 유일한 관찰자가 되어 이곳의 변화를 느끼고 있는 중입니다. 전날까지 멋진 곡선을 자랑하던 덩굴이 폭우가 내린 다음 날에는 가지가 부러져 연둣빛 물관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고, 두 송이밖에 없던 하얀 버섯 주위로 작은 것이 하나 더 생겨나 있습니다. 묘하게 숲이 내뿜는 향기도 달라졌습니다. 숲을 뒤집어 놓은 거센 폭우로 요즘에는 그리 향기로운 냄새가 나지 않아요. 이때의 양분을 힘껏 흡수하고 나면 다시 맑고 청명한 공기를 가득 내어줄 것 같습니다.

이런 날씨에는 가장 난감한 것이 산책로의 진흙탕입니다. 물기가 흥건한 흙을 밟을 때는 최대한 몸에서 힘을 빼고 발바닥을 평편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어느 한쪽에 힘이 많이 들어가는 순간 신발에 진흙이 잔뜩 묻게 됩니다. 한 번은 방심한 사이 오른쪽 발날에 힘이 많이 들어가 진흙이 신발에 스며들고 말았습니다. 내리막에서는 내디딘 발을 철회하기가 더욱 까다롭기 때문에 오르막에서보다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진흙을 밟아야 할 때마다 몸에 힘을 빼고 균형에 집중합니다. 기울지 않은 상태로 가볍게 천천히. 진흙탕을 건너는 방법입니다. 인생의 진창을 통과할 때에도 요긴한 태도라 생각합니다.

뉴질랜드의 숲
Bonito Scenic Reserve, Auckland, New Zealand / ⓒ chaelinjane, 2018

 

사람에 의해 가꿔지는 숲이 아닌 자연에 방치된 숲은, 걸음을 시작한 아가의 방처럼 온통 어질러져 있습니다. 하지만 숲이 '어질러진 상태'라는 것은 한낱 인간의 관점일 뿐, 깊은 내부의 자연 질서를 따라 그곳의 모든 생물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미묘한 것들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고 나서부터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던 방 안의 물건들이 비로소 개별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필요에 의해 조성된 '방'이라는 생태계는 숲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은 공간이라는 걸 실감한 것입니다. 정리정돈에 마냥 취약한 존재인 줄 알았던 제가 이렇게 근본부터 변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러한 성장이 반가울 따름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가을 바람과 함께 설레는 작은 변화가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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