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글로 호흡하기

2018. 8. 27. 08:19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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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22일 수요일

이번 주는 이곳에 비구름이 오래 머물러 있습니다. 비가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하는 것이 꼭 빈 종이에 점선을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잘못 그어진 선들이 있으면 이따금씩 천둥이 찾아와 지우개질을 하는데, 그때마다 밤하늘이 여리게 진동합니다. 밤낮 할 것 없이 지속적이지요. 아까는 텅 빈 공기가 적적해 잠도 불러올 겸 차분한 클래식 음악 모음집을 틀어 놓았습니다. 2시간이 모두 지나고 소름 끼치도록 서늘한 교향곡이 시작되기에 슬그머니 음악을 꺼버렸습니다. 클래식 음악은 깊고 섬세한 감정을 표현하기 때문에 불안감도 쉽게 증폭되더라고요. 게다가 악몽을 꿀 조금의 가능성도 허락하고 싶지 않았어요. 시간을 잊은 정적 위로 빗소리가 조용히 쌓입니다. 빗방울마저 집 주위를 둘러싼 숲의 잎새와 풀잎 위로 고단한 몸을 누이는 밤입니다.

©2018. Chaelinjane All Rights Reserved

 

예전에 살던 집으로 소포가 잘못 배달되었습니다. 다시는 갈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동네였습니다. 이 사진은 어제 소포를 찾아서 오는 길에 발견한 장면입니다. 카메라를 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비상등을 켜고 멈추었습니다. 비가 잠시 그친 때라 아직 마르지 않은 빗물이 땅에 남아서 반사된 하늘빛을 머금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온통 물감이 흩뿌려진 듯했지요. 하늘과 똑같은 색을 가진 작은 자동차의 존재감으로 캔들 스너퍼를 닮은 가로등, 길쭉한 나무, 뒷배경의 집들 모두 동화적인 분위기를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사진을 현상했어요. 마음 깊이 기억하고 있는 어떤 장면과 맞딱뜨리기 위해 집요하게 굴을 파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요즘은 사진에 대한 마음이 다시 들끓고 있습니다. 어떤 날은 온종일 사진에 대해 생각하다가 꿈에서도 사진 연구를 이어간 적도 있었어요. 내가 사진으로 표현하고 싶은 건 무엇인지, 세계문학이 존재하듯 '세계 사진'의 개념도 존재하는지, 시력을 잃고 마음으로 담아내는 사진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지 등등 생각의 연쇄가 끝도 없이 생겨났습니다. 지금까지의 생각들 중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것은, 저에게 사진을 찍는 것이 글을 쓰는 과정과 참 닮아 있다는 것입니다. 여백에 글자를 써넣기 전까지는 어떤 글을 쓰게 될지 예상할 수 없는 것처럼, 뷰파인더 안의 세상을 직접 들여다보지 않으면 내가 무엇을 찍게 될지 알 수가 없어요. 마음속의 표상이 퍼즐 조각처럼 흩어져 있고, 어떤 상황이 눈 앞에 펼쳐지는 순간 우연히 그에 맞는 퍼즐이 떠오릅니다. 단어를 선택해 활자로 써넣듯이 셔터를 눌러 화면 속의 장면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글을 쓸 때는 내부의 심상을 활자의 조합을 통해 밖으로 드러내고, 사진을 찍을 때는 외부의 장면을 빛과 색을 이용해 내면으로 불러들입니다. 그래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두 행위가 저에게는 호흡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세상의 많은 분야들이 그러하듯 텍스트와 이미지도 디지털 세계의 혜택을 흠뻑 누리고 있습니다. 타이핑을 통해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손글씨보다 빠르게 쫓을 수 있고, 인터넷에 마련된 공간 속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글을 전달할 수도 있습니다. 디지털로 기록되는 이미지나 텍스트는 제한 없이 저장될 수 있고, 디지털 현상을 통해서는 무제한적인 시도로 표현하고 싶은 모든 것을 실험해볼 수 있어요. '절제'만 가능하다면 이것은 크나큰 축복임이 분명합니다. 그렇기에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록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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