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라글란에서 생일을 (2) ─ 마누베이 서핑과 중심가 산책

2018. 8. 4. 11:44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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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26일 화요일

와나우 캠핑장의 아침

은은한 빛이 눈꺼풀에 닿습니다. 간밤에 꿈에서 봤던 물고기들이 머릿속을 희미하게 헤엄치고 다녔어요. 어, 이거 분명 길몽인데! 하늘이 생일 선물로 툭 던져 놓고 간 게 틀림없었습니다. 막연하게 좋은 일이 있을 거라 기대하니 잠에서 깨기도 전에 미소가 번졌어요. 생일은 하루 지났지만 이왕 주말에 낀 거 일요일까지만이라도 즐거운 기분을 연장하기로 했습니다. 4월 초 오포우티어 캠핑 이후로 드디어 두 달 반 만에 야외에서 맞는 두 번째 아침입니다. 오포우티어에서 피톤치드에 취해 아침부터 정말 기분이 좋았거든요. 여기서도 얼른 상쾌한 아침을 누려야겠습니다. 앞좌석에 놔둔 세면도구와 카메라를 챙겼습니다. 차 안의 공기가 새벽처럼 으슬으슬해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차 문을 열었습니다. 웬걸요, 뜻밖의 따스한 기운이 닿았습니다.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이 온화한 열기로 얼어 있던 대지를 녹여내던 참이었어요.

 

라글란의 아침
Te Kopua Whanau Camp, Raglan, New Zealand / ⓒchaelinjane, 2018


텁텁해진 입을 씻어내고 얼음 같은 물로 세수를 하고 나니 맑은 공기가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드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찬물로 씻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쾌감이랄까요.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제가 좋아하는 '깊은 나무숲 향기'가 아닌 '짙은 풀밭 향기'였다는 것. 저에게 나무숲 향기가 어두운 청록과 갈색이 버무려진 부드러운 향기라면, 풀밭 향기는 연둣빛깔의 톡 쏘는 향입니다. 와인 테이스팅 노트에서도 '오크향'과 '풀향'을 분명히 다르게 분류됩니다. 똑같이 신선한 공기라도 깊은 나무숲 향기는 24시간 내내 맡을 수 있지만, 센 풀밭 향기는 공기를 압도하는 경향이 있어 나무숲 향기처럼 은은하지는 못합니다.

캠핑 고수의 세팅
Te Kopua Whanau Camp, Raglan, New Zealand / ⓒchaelinjane, 2018


옆집 캠핑카 부부가 아침에 저를 보고서 만다린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캠핑 트레일러에, 텐트에, 태양열 집열판에, 옆집은 없는 게 없어 보였어요. 저도 언젠가 가족이 생긴다면 꼭 정기적으로 제대로 된 캠핑을 즐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전 10시 30분이 체크아웃 시간이었지만 마누 베이에 일찍 가서 좋은 주차 자리를 확보해두고 아침 식사를 즐기기로 했습니다.

 

라글란의 마누 베이(Manu Bay)

새로운 장소를 촬영할 생각에 부풀어 마누 베이에 도착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포인트 브레이크*가 세 곳이 있는데, 그중 한 곳이 바로 여기 라글란의 마누 베이라고 합니다.

*포인트 브레이크: 특정 지점에서만 파도가 부서지는 서핑 스팟

 

뉴질랜드 라글란 마누베이
Manu Bay, Raglan, New Zealand / ⓒchaelinjane, 2018

 

 

라글란에서 하루 동안 서핑을 한다면
당신은 파도를 두 번 타게 될 겁니다.
아침 먹고 한 번, 점심 먹고 한 번.
세 번 시도했다가는 굶어 죽을지도 몰라요!

 

브루스 브라운의 1966년도 클래식 서프 다큐멘터리 필름 <파도 속으로 (원제: The Endless Summer)>에서 아주 긴- 라이딩 장면과 함께 내레이션이 흘러나옵니다. 이 인상적인 소개 이후로 마누 베이는 전 세계적인 관심을 얻게 되었고, 여름이면 해마다 여러 서핑 대회가 열리는 최적의 스팟으로 자리매김했다고 합니다. 이곳은 서핑 뿐만 아니라 촬영하기에도 좋은 장소입니다. 주차해놓은 곳 바로 앞에 포인트가 있어서 파도와 서퍼들을 아주 속 시원하게 내려다볼 수 있거든요.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랬던가요. 어제의 굵고 힘 있는 파도는 다 어디가고 축 처지고 등이 굽어 기어 오는 파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일단 아침을 먹으면서 계속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이따금씩 건강한 파도가 하나씩 들어와 세계적인 포인트 브레이크 스팟으로서의 명성을 간신히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보드를 싣고 온 몇몇 서퍼들은 파도를 보더니 속도를 늦추지도 않고 그대로 휑하니 가버렸습니다.

뉴질랜드 마누베이 서핑
Manu Bay, Raglan, New Zealand / ⓒchaelinjane, 2018

 

오늘은 파도가 작아서 괜찮았지만,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암석이 많아서 파도가 크게 들어오고 수심이 깊어지는 날에는 무척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몇몇 서퍼들은 인내심을 발휘해 띄엄띄엄 찾아오는 파도 몇 개를 잡아 타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 서퍼들에게 오늘이 롱 라이딩의 그날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영감을 주는 마을

사실 어젯밤 터키 케밥집에 왔을 때부터 중심가를 구경해보고 싶었습니다. 라글란은 전통 있는 마오리 문화에 대한 존경과 함께, 새로 이주하는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의 문화가 융합되어 끊임없이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곳입니다. 작은 마을이지만 대단히 멋진 기류가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점심 무렵이라 거리 곳곳에서 활기가 넘쳤습니다. 가고 싶은 카페가 손님들로 만석이기에 우선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라글란 시내 카페
Bow Street, Raglan, New Zealand / ⓒchaelinjane, 2018


카페는 한 곳만 경험해보기로 했습니다. 음식과 커피 중 '음식'을 선택했어요. 그래서 'Raglan Roast'는 아쉽게 선택지에서 밀려났습니다. 커피로만 말할 것 같으면 사실 무조건 저곳으로 가야 한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거든요. 다음에 라글란에 오면 제일 먼저 라글란 로스트의 커피부터 맛봐야겠습니다.

상점들마다 개성이 뚜렷하고 제품들의 퀄리티가 높은 편이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유리를 녹여서 업사이클링하는 보우 스트리트 갤러리의 장인 아저씨, 다양한 브랜드의 서핑 용품을 취급하는 Emporium 서프 샵, 빈티지한 보물들이 잠들어 있는 선물 가게 Zinnia 등 유니크한 상점들과 골목 풍경이 라글란의 색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습니다.

 

뉴질랜드 빈티지 포스터

 

Goods from Raglan, New Zealand / ⓒchaelinjane, 2018

 

제가 모은 라글란 기념품입니다.

1) 뉴질랜드 빈티지 일러스트 지도 포스터(맨 위)
2) 전 세계에 있는 특이하고도 특별한 집을 건축가와 함께 소개하는 재미난 일러스트북 『H.O.U.S.E』
3) 마오리 여인의 모습이 프린트된 나무판 엽서
4) 너무 자세히 수록해놔서 로컬 서퍼들의 원망을 사기도 했다는 『New Zealand Surfing Guide』 그렇지만 정말 알려줄 수 없는 포인트에는 해골 마크와 함께 Spot X라 적혀 있습니다. 책에서는 알려줄 수 없으니 '친절한' 로컬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하네요.

(일러스트북과 뉴질랜드 서핑 가이드북은 나중에 선물로 쓸 일이 있어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배고픈 서퍼를 위한 최고의 카페, The Shack

이 글을 쓸 때쯤 발견한 글 중에 현지인이 직접 쓴 '라글란에서 꼭 해야할 것' 목록이 있었습니다. 그중 카페 The Shack에서 아침 식사하기가 있더라고요. 건물 전체에서 풍겨오는 느낌에 본능적으로 끌려서 선택한 카페였는데 촉이 마침 잘 맞았습니다. 식사 메뉴도 어제 먹었던 케밥과 가격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서 여기서 커피와 식사를 한 번에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메뉴 중에 한 접시에 $4 하는 '김치'도 있어서 매우 놀랐습니다. 정직하고 좋은 로컬 음식들을 제공한다는 이 카페의 슬로건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건강한 식재료에 대한 다문화적 고민을 이어가는 곳이었습니다. 메뉴판을 주욱 훑어보던 그때 눈에 딱 들어오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헝그리 서퍼!"

더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요. 바로 이걸로 주문했습니다. 미지의 메뉴를 기대하면서 음식이 나올 동안 구매한 책을 훑어보고 다이어리를 썼습니다. 외식에 지출하는 돈을 아끼고 있었기에 이런 시간은 무척 특별합니다. 저는 커피 한 잔에 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 한 젊은 여인과 서로의 눈에서 오래된 사랑이 반짝이는 한 30대 커플 테이블 사이에 앉아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모르는 사람들과의 이렇게 가까운 거리감을 부담스러워했는데 뉴질랜드에 오고 난 뒤로는 딱히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의 인구 밀도가 한 개인의 심리 상태에도 영향을 미치는 걸까요.

 

뉴질랜드 라글란 카페 The Shack
The Shack, Raglan, New Zealand / ⓒchaelinjane, 2018


제가 앉은 소파 바로 뒤 창밖에는 야외 테이블이 세 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표지판이 걸린 기둥에는 식사를 즐기고 있는 가족의 애완견 한 마리가 묶여서 지나가는 아이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지요. 뉴질랜드에는 거리에서나 쇼핑몰 안, 심지어 술집 안에서도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데 물론 아이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이가 땅바닥에 손만 짚어도 "에잇, 지지!" 하면서 손을 털고 닦아 내는 한국의 부모들이, 아이가 온 바닥에 눕고 기어 다녀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을 본다면 적잖은 충격을 받을 것 같습니다. 국민들이 자국의 깨끗한 환경을 신뢰한다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행동이니까요. 

뉴질랜드 라글란 The Shack카페 헝그리 서퍼

 

치킨과 베이컨, 감자, 플랫 브레드, 치즈, 아이올리 소스(마늘과 올리브유로 만든 지중해식 소스), 토마토 케첩과 갖가지 풀들이 어우러진 헝그리 서퍼는 이름처럼 양이 정말 많았습니다. 느긋하게 즐기는 휴양지 같은 오후가 지나갔어요. 태양이 아직 한참 뜨거울 때 라글란을 떠나야 했지만, 새로운 한 주를 맞이하기 위해 남은 일요일은 집에서 편안하게 쉬기로 합니다.

맑고 건강한 웰링턴 같은 분위기가 풍겼던 서퍼들의 마을, 라글란. 세계 곳곳에 자기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어두다가 결국 다 정리하고 이곳에 정착했다는 어느 부부의 마음이 이해가 갈 정도로 제가 꿈꾸던, 이상적인 마을이었습니다. 가능한 오래오래 곁에 두고 찾아오고 싶은 곳입니다. 단골 가게도 생기고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지내고 싶은 곳을 발견한, 아주 완벽한 생일 여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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